충렬공 金方慶 74---만년 기록6 (연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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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3 11:22 조회1,554회 댓글0건본문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1993.8, 류선영, 전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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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279년 그는 충렬왕의 폐행으로 알려진 안렴사 권의를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한 죄를 들어 탄핵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일본원정 이후 논공행상의 불공평이 지적되는 등 문제가 일어나자 곧 사직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는 세 차례나 사직을 원하였으나 충렬왕은 원의 일본정벌에 그가 있어야 됨을 이유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방경은 마침내 앞에서 살핀 것처럼 신정 하례사로 원에 갔고 원제에게 일본정벌의 명을 받았던 것이다.
1281년 제2차 일본정벌로 실패하였다. 이후 김방경은 조인규의 참소를 받았다. 조인규는 왕이 행차할 때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예를 취하지 않고 지나간 것을 들어 김방경을 참소하였고, 이에 김방경은 순마소에 갇혔던 것이다. 이후 김방경은 곧 풀려났지만 그는 다시 사직을 원하였고 마침내 1283년(충렬왕9) 72세의 나이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왕이 김방경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또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고, 또 1295년 그가 첨의령, 상락군개국공으로 봉해지고 세자의 청으로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가 하사되었다.
1299년 조비무고사건 때는 궁궐에 나아가 조비를 옹호하는 등 개입을 했고, "퇴임 후에도 항상 나라 일을 걱정했다" 고 한 것처럼, 그는 치사한 후에도 일정하게 정사에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충렬왕과 충선와의 왕위분쟁으로 조정이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이때 그는 조비를 변호하는 등 충렬왕에 대립하여 충선왕의 편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1300년(충렬와26) 89세로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가 예장으로 치러지지 못했던 것은 그나 그의 아들 흔이 충선왕에 협조함으로써 충렬왕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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