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75---만년 기록7 (이승휴와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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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3 14:14 조회1,593회 댓글0건본문
이승휴(1224-1300)의 문집 동안거사집 <잡저(雜著) 일부>에 보면 충렬공과 이승휴의 주고받은 편지, 고부(古賦), 답신이 실려 있습니다. ***<잡저(雜著) 일부>라 함은 저자의 저술이 많았으나 산일(散佚)되고, 만년의 저작인 <촌거자계문(村居自誡文)> 등 14편만을 이르는 것이다.
충렬공 84세(=1295년) 11월 12일에 영공(令公=첨의령 충렬공)이 보낸 편지를 안집사(安集使=?안렴사)가 전하여 이승휴가 받아 보았다.
이승휴가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궤杖) 아래에 바쳤다.
충렬공께서 전에 붙여 준 고부(古賦) 1편을 받았는데, 늙고 병듦으로 해서 미처 답할 겨를이 없었다가, 이듬해 원정(元貞)2년(=1296년)2월에 화답하여 돈헌(돈=豚밑책바침=軒)에게 부쳐 보인다고 하고 있다.
■ 동안거사집 (이승휴 著, 삼척시 번역 간행)
단모부(旦暮賦)
---이해 11월 12일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첨의령 충렬공)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충선왕)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 동안거사집 (이승휴 著, 삼척시 번역 간행)
단모부(旦暮賦)
전(傳)에 이르기를, "...만세 이후에나 이 말 뜻을 이해하는 한 성인(聖人)이 나타나면 그것은 아침에 만났다가 저녁에 만난 듯이 대단히 일찍 만난 것이라..." 하였으니 정성스럽다 이말이여.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 원묘조(元朝) 11년(1270년)에 재상이 되고, 임금이 왕위에 있던 초에 이르러 지위가 상상(上相)올랐으며,
송도(松都)에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뜻을 펴지 못하여 날뛰던 무리가 강화도에 까마귀 떼처럼 모여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모여 있으면서 인근 주를 삼키고 바다를 점거해서 날뛰니, 일이 도모하기 어려웠다.
이에 상국(上國)이 명하여 관군(官軍)을 내여, 본군(本軍)과 합하여 정벌할 때에 공이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진퇴의 법칙이 평소에 훈련한 바가 아니었으나 양국의 군사가 모두 그 마음을 얻어서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았다. 한 번 거사함에 그들을 양떼 몰아내듯이 평정하니, 부녀자들이 개가를 노래하고, 군대는 돌아왔다.
또 상조(上朝)의 원수(元帥) 혼독(혼篤)과 더불어 같이 왜국을 칠 적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전쟁을 지휘하며 해가 돋아 오르는 바다 끝까지 들어갔다. 황제의 위엄을 혁혁히 빛내고 미역(尾域)지역을 편안히 하고, 무덕(武德)을 선포해서 큰 공을 아뢰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고, 전후(前後)의 공을 크게 드날려서 그를 동번제로도원수(東번諸路都元帥)로 삼아서 특별한 은총으로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동쪽 정벌이 없는 해가 없었고, 어떤 싸움에도 공이 거느리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의 수전(水戰)·육전(陸戰)의 기이한 계책이 국사(高麗史)에 갖춰 실려 있다. -----
제가 공경히 꿇어 엎드려 편지를 받들어 읽고, 거듭 그 사실을 밝혀서 평하여 말하였다. 종신(宗臣=왕족)과 석보(碩輔=재상)로서 중국에 조알하고 왕래한 자가 고조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자취가 서로 이어졌으되, 그 도원수(都元帥)의 직임(職任)을 받은 자가 있었던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도다.
또한 공(公)이란 오등제후 (五等諸侯=공,후,백,자,남)의 으뜸 작위(爵位)이므로, 외부로 나가면 열국의 으뜸이 되고, 천자에게로 들어오면 천자의 다음이 되니, 그 등급은 발돋움을 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혹시 시기를 잘 타고 갑자기 일어나서, 전쟁터의 털끝 만한 공도 없으면서, 다만 서울을 휩쓸 정도의 권세로써 외람되게 나아가서, 높은 자리를 맡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일이 잘못되고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니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공과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패왕(覇王)을 보필할 만한 영특한 재능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갔는데 험한 파도가 용솟음 쳤으나 뱃머리는 그 어지러운 것을 헤치고 나아갔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 말발굽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그래서 해외(海外)의 다른 나라에 우리 나라의 무공을 드날려, 조공(朝貢)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하여 천자에게 승첩을 바쳤다. 사해의 군주이신 황제가 헌함에 기대어 돌아보고 물었는데, 위엄스런 얼굴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재량껏 대답하는 논변을 발휘하여 또다시 천자의 장려를 입게 되었다. 비록 소백(小伯)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은 것과 진후(晉候)가 세차례 천자를 뵈러 간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 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三達尊), 녹야당(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구중궁궐에서는 공신에 봉하여 대려의 잊기 어려운 맹세를 돈독히 했고, 온 나라에서는 '아형(阿衡)만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겠는가?'라는 감탄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그 나이가 높을수록 그 덕은 더욱 높다 하겠다.
우리 전하께서는 덕은 중윤(重輪)보다 더 뛰어나고, 뜻은 오로지 나라를 감독하는데 두었다. 그래서 어진 사람을 초치하는 북을 올리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는 깃발을 세워서 힘쓰고 노력하기를 급급하게 하면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마땅히 이런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일컬어 말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성심으로 사모하게 된다는 것은 천하의 공언(公言)이니, 그 누가 이 일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우리 폐하께선 사람은 오직 옛사람을 구하고, 착한 것은 반드시 따른다는 마음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대신(大臣)의 공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해서 마침내 훌륭한 명을 내려서 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公)으로 삼으니 이는 후현(後賢)들의 길을 넓힌 것이다.
이것은 실로 천하의 공적인 장려이니, 그 누가 이 상(賞)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공(公)이 오늘날 공(公)이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요행으로 공(公)이 된 것과는 다르다. 대개 하늘은 사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덕 있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미 그 상수(上壽)를 주어서 그 몸을 편케 했으되, 뜻이 오히려 부족해서 또 상작(上爵)을 주어서 그 지위를 높게 해주었다.
원컨대, 공(公)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순응해서, 그 분수를 편케 여겨서 영화를 누리소서. 앞에서 이른바 "만세의 뒤에 한 번 성인을 만나 그 견해를 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궤杖) 아래에 바칩니다.
그 사(辭)는 다음과 같다
성군(聖君)이 태어남이여!
풍운(風雲)의 길을 열고,
재상과 함께 조정에 진출(進出)함이여,
경위(經緯)를 도모했다.
타고난 충성심(忠誠心)을 다하여 삼한(三韓)을 도우고,
황비(荒肥)에 으뜸이 되매, 만민을 편안케 하였도다.
중조(中朝)에 조회를 가서 큰 공을 아뢰고,
동로(東路)에 길잡이가 됨이여, 도원수가 되었도다.
군사가 백만이 됨이여, 더욱 더 잘 다스렸고,
춘추가 80에 4년이 지났도다.
정신은 맑고 기운은 장대함이여, 몸은 기력이 강건하였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으니,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도다.
중신(中宸)은 옛 일을 도모하는 뜻을 돈독히 하여 잊지 않고,
동궁(東宮)이 나라를 감독함이여! 태평정치를 아름답게 이루었도다.
후현들을 격려하기를 기약함이야,
포상하여 책봉하고, 개국공상락군(開國公上洛郡)으로 봉해 줌이여,
공(公)으로 은총을 내려주었다.
★맏아들 영공(令公)은 월편(越篇)을 계승했고,
★막내아들은 학사가 되어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도다.
여러 손자들의 빛남이여,
뜰에 가득하고 손님들이 환호하며 왁자지껄함이여! 마을에 가득하도다.
어깨를 부딪히며 헌수하며 종종걸음치고,
길가는 사람들도 공(公)을 어질다 말하며 눈물을 흘리도다.
송나라 왕형공(王荊公)이 있음이여! 경륜을 양보하였고,
당나라 곽분양(郭汾陽)이 있음이여! 그 시작과 마침이 다소 부끄러웠다.
송축(頌祝)의 노래 소리는 조야(朝野)에 드날림이여!
장수(長壽)를 축원하고 미담이 어부와 초부에게도 미침이여,
성대한 일을 자랑하도다.
원숭이가 울고 학이 울음이여 환성으로 전송하고,
잣나무가 좋아하고 소나무도 기뻐하며 축하의 뜻을 베풀도다.
■ 동안거사집 (이승휴 著, 삼척시 번역 간행)
전에 붙여 준 고부(古賦) 1편을 받았는데, 늙고 병듦으로 해서 미처 답할 겨를이 없었다가, 이제야 화답하여 돈헌(돈=豚밑책바침=軒)에게 부쳐 보인다.
천지(天地)가 높고 낮음이여! 씨줄로 삼고, 성현(聖賢)이 오고 감이여! 날줄과 같도다. 그 나가고 취함이 있음이여, 무리와 더불어 했도다.
벼슬하지 않으면 산림에 있거나, 혹 강호에 있었고 세상에 나가서는 정승도 되고 장수도 되었도다. 박(剝)이 허물이 없음이여 육삼(六三)에 있도다.(1)돈(돈=豚밑에책바침한글자)의 길하고 좋음이여 구사(九四)에 있도다.(2)당(唐)의 요(堯)임금이 팔짱만 끼고 다스림이여! 칭송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허유(許由)3)가 귀를 씻음이여 또한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오직 성명(性命)만을 회복하려 함이여! 그 명성(名聲)은 의식하지 않으며, 반드시 나가고 물러날 필요가 없음이여, 세상이 어지럽고 세상이 다스려짐으로 말미암았도다. 선현(先賢)과 후현(後賢)이 한 것이 혹 같기도 하니, 그때나 이때가 어찌 다르겠는가.지금 우리 성주(聖主)께서는 덕은 요(堯)임금과 같고, 마침 은사(隱士)가 있는데 성(姓)은 이(李)씨로다.
조정(朝廷)에 설 만하면 조정에서 벼슬하고, 향리(鄕里)에 돌아갈 만하면 향리에 살았도다. 도통(道通)을 떨어뜨리지 아니하니 노자(老子)·장자(莊子)보다 더 깊고, 유학(儒學)의 문을 다시 열어 줌이여, 수사(洙泗)4)에 비길 만 하도다. 이미 청정함이여, 그 마침을 잘 마쳤고, 어찌 충의를 처음에만 시작하겠는가. 노을을 먹고 기(氣)를 먹음이여! 참다운 공부가 있었고, 경을 말하고 부처에게 예를 말함이여! 다른 일이 없었도다. 나의 공명(功名)같은 것이야 어찌 그대의 마음에 있겠으며 공(公)의 덕행(德行)같은 것은 곧 나의 뜻이로다.
원정(元貞)2년(충렬왕22년=1296년)2월
(1)주역의 박괘 육삼 효의 뜻으로 소인은 음을 버리고 군자는 양을 취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고 하였음
(2)주역 돈괘 구사효의 뜻으로 사욕을 버리는 군자이기 때문에 길하다고 하였음
(3)허유 : 요임금이 허유를 찾아가 천하를 물려 주겠다고 하자 허유가 오늘 별소리를 다 들었다고 하며 귀를 씻었다는 옛일이 있다.
(4) 공자를 말함
●동안거사문집 動安居士文集
고려 말기의 문인 ·학자인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시문집.
구분 : 시문집, 목판본
저자 : 이승휴(李承休)
시대 : 고려 공민왕 9년(1360)
목판본. 4권 1책. 저자의 차자(次子)인 ★연종(衍宗)이 편집한 것을 질서(姪絳) ★안극인(安克仁)이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있을 때인 1360년(공민왕 9) 저자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재간하면서 이 책도 함께 개판한 것으로 추정된다.
행록 4권 중의 3권은 시이며, 1권은 빈왕록병서(賓王錄竝序)인데, 이는 저자가 1273년(원종 14) 3월 원(元)나라 황후와 황태자의 책립을 치하하고자 사행(使行)하였을 때 지은 시집이다.
저자는 정치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장가로서 원나라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친 바 있다. 수록된 각 시에 붙인 상세한 서(序)와 주(註)는 사절의 예식절차와 당시의 정경 등을 묘사하고 있어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도 크다.
또, 저자는 독실한 불교도로서, 그 시상(詩想)은 불교적으로 탈속한 경지를 보여준다. 이 문집에는 1359년(공민왕 8)에 이색(李穡)이 지은 서문이 있다. 황의돈(黃義敦)이 소장하던 유일본을 1939년에 《제왕운기》와 아울러 영인, 간행하여 널리 세상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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