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77---충렬공과 불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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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4 12:28 조회2,180회 댓글0건본문
■ 보조사상 제19집 (2003.2, 보조사상연구원, 불일출판사)
● 목우자 지눌의 선풍과 고려후기 조선초 불교계의 고승들
-수선사계 고승들의 사법관계와 그 선풍을 중심으로- (황인규 /동국대)
한국불교사의 흐름 속에 위대한 고승들이 수없이 출현하였으나 그 가운데 우뚝 솟은 인물을 꼽으라면 고대의 원효(617-686),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조선의 서산대사 청허당 휴정(1520-1604)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지눌은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인 선교의 갈등을 해결하여 우리의 불교의 독자적인 전통을 개척하였으며 보수화된 불교계를 혁신하여 민중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결사운동을 전개했다. 바로 이러한 그의 큰 뜻은 향후 불교계는 물론이고 사상계 내지 사회전반에 걸쳐 이루어 졌다.
1. 지눌의 선풍과 혜심의 수선사 선풍
고려중기 이래 크게는 네 차례 중국 선풍이 전래 또는 수용되고 있었다. 그 첫 번째는 고려중기 대감국사 탄연(1069-1158)이 북송 임제종승인 육왕개심(1080-1148)과 교류하였고, 무인집권기 보조 지눌이 간화선을 수용하였다. 세 번째는 원간섭기 몽산덕이(122-?)와의 교류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공민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중국의 임제선풍의 수용이 있었다.
지눌은 당시 불교계의 승과에 합격하고 개경의 주요 승려들이 회합하는 모임에 참여하였으나 보수화된 분위기에 크게 실망하고 개경에서 아주 먼 남부지방에서 불교계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것이 바로 수선사 결사운동이며 같은 시기 전라도 강진에서 펼쳐졌던 천태종의 원묘국사 요세에 의하여 전개되었던 백련사 결사운동과 그 짝을 이룬다고 하겠다.
결사 초기에는 당시 집권세력인 무신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으나 제2세 진각국사 慧諶(혜심) 때에 이르러 왕실과 무신 귀족, 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함으로써 중앙의 정치세력과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교단은 크게 발전하였고 제3세 夢如(몽여), 제4세 混元(혼원), 제5세 天英(천영)에 이르기까지 사세는 절정에 다다랐으나 원간섭기 특히 충지 대에 이르면서 쇠락을 면치 못하다가 만항 대에 이르러 사세가 다소 회복되었다. 따라서 수선사의 사세는 지눌에서 천영 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 전성을 이루었고 고려말기에 수선사가 동방제일도량으로 표기되었듯이 다시 사세가 회복되었다.
원진국사 承逈(승형, 1187-1221)은 혜심보다 9년 뒤에 혼원보다 2년 전에 태어난 인물로 혜심이나 혼원과 동시대를 살았던 희양산문계 고승으로는 유일하게 국사에 추증된 인물이다. 그런데 천책은 그를 ‘조계원진국사’라 하고 있을 정도이므로 지눌의 선풍을 계승했고 보여진다.
원진국사 승형의 문도들이 혜심에게 요청하여 보경사에서 설법한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지눌에 이어 혜심 대에도 희양산문 승형의 문도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지산문 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224년 승형이 입적하자 임금의 명에 의하여 청하 내연사 (현재의 포항 보경사)에 원진국사 승형의 부도와 비를 세우는데, 비문은 이공로 撰, (충렬공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 書로 세운 것이다. 이공로, 김효인 모두 영열공 금의 門下로 당시 [금학사 옥순문생] 이라 불리었다.
무엇보다도 지눌의 선풍은 그의 수제자 진각국사 慧諶(1178-1234)에게 전해졌을 것은 당연하다.
우선 혜심은 지눌이 수선사를 창설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하고 있을때 찾아가 출가하였고 1208년 그에게 수선사 사주를 물려받고 수선사를 증축하였다. 그리고 지눌이 입적했을 때 행장과 비를 세우는 것을 주관했으므로 그의 충실한 제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남긴 어록이나 문집인 <무의자시집>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234년 혜심이 입적하자 임금의 명에 의하여(최우 등 집권자의 명으로) 수선사(현재의 전남 송광사)에 부도를, 월남사(현재의 전남 강진 월남사지)에 비를 세우는데, 진각국사비 前面은 1238-1241년 사이에 이규보(1241년 몰) 撰, (충렬공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 書로 세우고, 비 後面은 陰記로서 1250년 최자 撰, 승 탁연 書로 정안 몽여 등이 참여하여 세운 것이다. 후면 음기에는 진각국사의 門徒가 나열되어 있는데, 당시의 집권자 진양공 최우를 비롯하여 이규보, 정안, 몽여, 秘書監 金孝印 등 수많은 문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규보(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저)는 (충렬공 김방경의 백부) 김창과 함께 임유의 門下이고, 김효인, 최자(보한집 저)는 영열공 금의 門下로서 당시 [금학사 옥순문생]이라 불리었다. 이규보, 정안, 몽여, 수기 등은 팔만대장경 제작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비 후면은 상당부분 남아 있으나, 비 전면은 완전히 떨어져 나가 흔적이 없는데, 옛부터 송광사에 있었던 비편 하나가 국립광주박물관에 있고, 1972년에 민현구 교수팀이 비 주변 대밭에서 발견한 비편 하나가 있다.
1500년대 중반 백호 임제가 월남사 옛 절터를 지날때에는 옛 비가 야외 들판의 다리로 놓여 있다고 했다.
이처럼 혜심은 선종계 뿐만 아니라 천태종계에도 그 영향을 주었으며 화엄종계와도 교류 내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혜심의 선풍은 그가 1000여명 승려를 이끌 정도였으므로 그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고 이에 문도들도 많았을 것이나 알려진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법을 사사받은 수선사 3세가 되는 청진국사 몽여(?-1252)를 비롯하여 수선사 4세가 되는 혼원(1190-1271)에게 법을 전수했고, 수선사 5세가 되는 원오국사 천영(1215-1286)를 사사했다. 그 밖에 탁연, 각운 등이 보인다. 따라서 혜심의 선풍을 사사받은 인물들이 수선사풍을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2. 혼원, 천영의 수선사 선풍과 선원사
지눌이 세우고 혜심이 확립한 수선사의 선풍은 몽여 대를 거쳐서 혼영과 천영 대에 그 절정에 달한다고 할 수 있다. 지눌에서 몽여 대까지 수선사의 사주의 시기는 60여년간(1190-1215)이며, 혼원에서 천영 대는 35년간(1252-1286)인데 이 시기는 수선사의 최고의 전성기이었다. 이는 지방의 남단에서 결사운동을 전개했던 이전의 시기에서 혜심대부터 이루어진 최씨무인정권과의 결연이 가속화되더니 혼원과 천영대에 이르러 확고해졌다.
그 중에서도 천영대 30여년이 절정기인데 1245년(고종32) 강도시대(1232.6-1270.5)를 맞이하여 제2의 수선사라고 할 선원사를 짓고 수선사계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사주로 임명한 후 수선사 사주에 취임하게 하였다. 따라서 수선사 선풍은 송광사만이 아니라 강도 선원사에서도 그 발흥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눌이 창건하거나 주지로 재임한 창평 청원사, 공산 거조사, 백운정사, 억보산의 적취암, 서봉사 조월암 보문사(우거), 혜심이 주석하였던 단속사, 월징사, 지리산 금대암, 월남사, 혼원(1190-1271)이 주석하거나 하산소였던 정혜사, 와룡사, 천영(1215-1286)이 주맹이나 주석하였던 단속사, 창복사, 보제사 별원, 만항(1249-1319)이 주지로 있었던 삼장사, 낭월사, 복구(1270-1356)가 주지로 있었던 백암사, 월남사, 불갑사 그리고 그들의 문도가 주석하였던 사찰들이 있었다.
1251년(고종38)에 당시 실권자 최항이 보제사 별원을 짓고 9산선문의 선사를 초청하고 스님이 주맹하여 조계종 종강을 크게 확장하므로 ---
▶▶▶충렬공과 보제사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3. 충지와 그 이후의 수선사 선풍
최씨 정권이 몰락한 1258년(고종45) 이후인 混元(1190-1271)과 天英(1215-1286) 말년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여 冲止(1216-1293)이후 급속히 쇠락하여 갔다. 이러한 때 가지산문의 一然(1206-1289)이 보수 지배세력의 지원을 받아 그 세력을 확장하였고, 일시적으로 묘련사 계통과 교권장악을 위해 대립하기도 하였다.
무신집권기에 이르면서 사굴산문은 지눌이 무신집권기 최씨정권의 지원을 받아 당시의 불교계를 주도하였으나 원 간섭기에 이르면서 쇠락하고 그 대신 보각국사 일연이 등장하면서 가지산문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수선사의 사세가 쇠락해 갈 때 수선사의 선풍을 회복하려고 애쓴 인물이 원감국사 冲止(충지)이다.
그는 1286년(충렬왕12)에 원오국사 천영이 입적하자 수선사 6세가 되었으니 비문 찬자의 말과 같이 목우자의 정통을 이어받았던 인물이다.
이처럼 그는 지눌 혜심 그리고 천영의 선풍을 이었고 선원사에서 대장경을 가져와 수선하고 원각소를 강설하는 등 선교융화적인 기풍은 여전히 찾아지고 있으나 그의 문도로 청안, 진적, 신열, 진강 등이 충지의 入碑에 참여하거나 원감국사집 발문을 지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없을 정도로 열악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사정은 충지 다음에 수선사 7세 자정국사 8세 자각국사 9세 담당국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들은 행장이나 비문조차 전해지지 않고 단편적인 기록도 거의 없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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