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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78---충렬공과 불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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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4 12:29 조회1,6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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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후기 조선초 불교사 연구 (2003, 황인규 혜안)

이렇듯 충지를 전후하여 수선사의 사주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사실이 없을 정도로 그 사세가 쇠락해 갈 때 선종계는 가지산문의 고승인 보각국사 일연이 등장하여 수선사 지눌의 유풍을 진작시켰던 것으로 여겨져 주목된다.

일연(1206-1289)은 1219년 14세에 가지산문의 설악산 진전사에서 대웅에게 득도하고 구족계를 받은 뒤 1246년(고종33)에 당시 재상이었던 정안의 초빙을 받아 세운 정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여기서 대장경판을 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1261년(원종2)에 왕의 부름을 받고 선월사에 머물면서 목우자의 법을 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일연의 혜심의 제자 몽여에게 [조동오위]를 증편하여 그에게 점검을 받았던 사실과 궤를 같이 한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산문이면서 사굴산문인 지눌의 법을 계승했다는 것은 두 산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지눌의 선교융화적이며 포용적 노력의 한 사례라 생각된다.


한편 유생들에게도 지눌의 선풍이 유통된 사례가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에서 찾아지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번 보내준 양측의 법어를 항상 牧牛子私記 위에 놓아두고 서로 바꿔 가며 보면서 보고 음미하여 싫어함이 없었으나 근기가 낮고 용렬해서 아득히 내 코를 찾아도 이해가 닿지 않았습니다. <전 중봉대부 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판사 세자사로 치사한 상락군개국공 식읍일천호 식실삼백호 金方慶이 滿月峯 了了庵 信和尙에게 답한 글> [동안거사집] 잡저 일부


일연은 임제종뿐만 아니라 조동종이나 우리나라의 고유의 민간신앙을 존중하는 등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고자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선풍이 그의 제자인 혼구에게 이르러서는 몽산의 선풍까지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296년) 겨울에 고려의 萬壽上人이 와서 말하기를 고려국 내원당 대선사 混丘, 靖寧院 公主 王氏 妙智, 明順院 公主 王氏 妙惠, 前都元帥 上洛公 金方慶, 侍中 韓康, 宰相 廉承益, --- 등 여러분이 재삼 편지를 보내서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法門景致>
*남권희, ‘필사본 제경촬요에 수록된 몽산 덕이와 고려인물들의 교류’ [도서관학논집]21, 1994

위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 만수상인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으나 그는 고려의 승속 10인을 재삼 몽산에게 전하고 가르침을 부탁하였던 인물이다. 그 승속인물 가운데 내원당의 대선사 혼구도 몽산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이렇듯 몽산의 선풍은 가지산문뿐만 아니라 다음 장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수선사와 수선사의 분원인 선원사에서 앞장서서 수용하였던 것이다.


3. 목우자 선풍과 여말선초 불교계

1) 만항, 충감의 선풍과 몽산선풍

수선사풍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만항(1249-1319) 대이며, 수선사계 선원사 승려였던 원명국사 충감(1274-1338)을 거쳐 각진국사 복구(1270-1356) 대에 이루어진다. 이들은 모두 원오국사 천영의 문도인데 -----

만항은 1263년 원오국사에게 출가한 후 충렬왕대 삼장사 주지에 취임하고 낭월사, 운흥사, 선원사의 주지를 하였다. 그는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별전종주속조등묘명존자’의 법호를 하사받았다. 그의 문도로는 경호와 小丘 등 700여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소지는 무학 자초의 출가사이다.

만항에게 있어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몽산의 선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298년 상인을 통하여 [육조대사 법보단경]을 1300년에 선원사에서 간행하였다. 이미 선학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몽산선풍은 13세기 후반에 활동한 몽산 덕이의 선풍이다. 그는 남송초에 번성한 임제종의 황용파와는 달리 남송말부터 주도적인 종세를 나타낸 임제종 양기파에 속하였다. 몽산선풍의 특징은 철저하게 간화선의 공안으로서만 의미를 부여하는 無字話頭의 看話一門과 宗師親見이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만항의 선풍은 지눌의 선풍을 포함한 수선사 선풍에다가 몽산의 그것이 결합된 전통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항보다 25년 뒤에 나타난 충감이 1304년 몽산의 제자인 철산소경을 원나라에 가서 직접 초빙하였다. 冲鑑(1274-1388)은 圓明國師로 책봉되었으며 호는 雪峰, 자는 절조, 성은 김, 평양군 永純의 동생이다.
1280년(충렬왕6) 7세에 선원사에서 출가하고 원오에게 사사받았다. 1292년(충렬왕18)에 승과에 급제하고 각지를 돌아다닌 뒤 원나라에 들어가 철산을 만나 함께 귀국했다. 그후 용천사 주지로 있으면서 백장의 선문청규를 실행하였으며 이어 15년 동안 선원사의 주지를 하였다. 1334년(충숙왕 복위7)부터 성주산 보광사에 주석하며 중건하였고 1338년에 보광사에서 입적하였다는 이것이 스님의 대체적인 행장인데,

그의 행적 가운데 중요한 것은 수선사 만항에 이어 몽산 선풍을 수용한 사실이다. 그는 1304년 몽산의 제자 철산 소경을 고려에 초빙하여 3년간 모셨을때 [고려국대장이안기]에 의하면 철산은 당시 고려사람들에게 “부처를 맞이한 듯 온 나라가 존숭하였고 머무는 곳마다 4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였다.” 고 한다.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충렬공 3자 문영공(김순)은
1306년 (충렬왕26, 대덕10)에 강원도 회양부(淮陽府) 금강산에 세운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를 민지 찬, 김순 서하였다.
---閔漬가 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判비서寺事문한학사 金恂 書하여 大德 10年 丙午 9月 日 記한 것으로, 1306년 (충렬왕26, 대덕10) 고려인 민지가 찬한 대장경 이안기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또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 26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 26, p19514)  (典據 : <周南瑞 編, 천하동문> 전갑집 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 1366책)의 <천하동문집>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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