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84---충렬공 거주지1 (안동 회곡리 죽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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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5 21:57 조회1,551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의 거주지를 요약해 보면
1) 1212-1227 (1-16세) : 어릴때 안동에 있는 조부 집에서 성장하다. 상락대, 영호루에서 유상하다.
2) 1227-1232 (16-21세) : 출사하여 개성에 거주하다.
3) 1232-1270 (21-59세) : 임시수도 강화도에 거주하다. 1248년에는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임지(청천강 입구 정주 위도 등)에 거주하다. 강화도 거주시절에 1253년에는 부 김효인 돌아가시고, 1256년에는 백부 김창 돌아가시고, 1268년경에는 모 금녕송씨 돌아가시자 고향에 들렸다.
4) 1270-1300 (59-89세) : 개성에 거주하다. 1283년(72세) 치사후 고향 안동에 자주 들리셨을 것이고, 상고산에 있는 정자에서 한동안 지내셨을 것이다.
▣ 영가지
○영가지(永嘉誌)」<안동읍지(安東邑誌)>에 의하면 안동(安東)에는 김방경(金方慶)의 유적(遺蹟)이 곳곳에 산재(散在)하고 있다.
上孤山 上洛公金方慶作亭其上, 基礎尙在, 上洛臺 在府西金谷村, 金方慶嘗遊賞地 (「永嘉誌」卷 2, 山川條) 《출전 : 영남 사림파의 형성 pp57/영남대학교 출판부/이수건》
☞‘상고산 위에 상락공 방경 할아버지께서 정자를 지으셨는데 지금도 그 기초가 남아있다.’ 그리고 상락대는 ‘안동부 서쪽 금곡마을에 있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유상한 곳이다.’
○상고산(上孤山) :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회곡촌(檜谷村) 앞의 남양담(南陽潭) 위에 있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12)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는데, 그 기초(基礎)가 지금도 남아있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91》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 간다. 외로운 산이 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있으니 여기가 충렬공(忠烈公)8) 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유전(流傳)하기를 이는 충렬공(忠烈公)의 집터라고 한다. 충렬공(忠烈公)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1 pp56》
○상락대(上洛臺) : 안동부 서쪽 25리 회곡촌(檜谷村)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일찍이 유상(遊賞)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동쪽에 마암(馬巖) 절벽이 있어 천길을 깎아 세운 듯 하다. 암서(巖西)에는 석대(石臺)가 반회(盤回)하고 기괴(奇怪)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우며, 아래는 맑은 못에 배를 댈만하고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돌 사이에는 비채(菲菜)가 많이 나는데, 전하기는 상락공이 심은 것이라 한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110》
▣ 김방경 행장 (1350년, 안진 발)
公은 어릴 때 안동에 있는 조부(=김민성)의 집에서 자라는데 조금이라도 불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길거리에 나가 누워서 울어도 수레와 말들이 지나가지 못하니 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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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침 모상(母喪)을 당하여 고향에 가셨다 돌아와서 얼마 안돼서 상장군(上將軍)이 되어서 -----남경(南京)으로 좌천(左遷)되었으니 이 때가 바로 지원(至元)5년(서기1268년)무진(戊辰)2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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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김민성)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 고려사 김방경 열전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敏成)의 집에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드러누워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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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왕에게 요청하여 고향 땅에 성묘하러 가게 되었는데 왕은 그의 아들 김순(恂)을 태백산 제고사(祭古使)로 임명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친구들의 만류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들더러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 들일 때가 되였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 福州(今安東) 映湖樓 /안동 영호루를 지나며
---충렬공 김방경
山水無非舊眼靑 /산천은 변함없이 옛모습 그대로 있고
樓臺亦是少年情 /루대도(복주루를 말함) 또한 소년시절의 정이 그대로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고국은 아직도 옛풍습 그대로 남아있고
收拾絃歌慰我行 /아름다운 거문고소리와 노래는 나의 갈길을 위로해 주도다
2)김순 묘갈 번역문
(출전 : 안양문화유적총람/안양시 문화공보담당관실/1996. 2월)
---임술년(壬戌年, =1299년)에 남방사신(南方使臣)의 명을 받고 선친(=김방경)을 배행(陪行)하여 고향 조부(=김효인) 묘소에 다녀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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