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86---충렬공 거주지3 (개성 고류동(孤柳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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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5 22:10 조회1,465회 댓글0건본문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후 개성 어딘가에 거주하시다가,
1278년 위득유 노진의 무고에 의한 충렬공 무고사건 기록을 보면 충렬공께서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충렬공 손자 김승용의 사저(私邸)가 고류동에 있다는 (1329년 김승용 묘지명) 기록으로 보아 장손자에게 물려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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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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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김방경과 그 아들 김흔을 문초하였다.
2월 병진일에 왕이 흔도, 홍다구를 흥국사에 모이게 하고 김방경을 문초하였으나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므로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에 귀양 보내었다.
■ 김승용묘지명(金承用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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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멸 ---) 천력<天曆, 원나라 문종(文宗)의 연호> 二 년 기사(一三二九)년 三월 갑술(甲戌)에 선수선무장군(宣授宣武將軍) 관고려국만호(管高麗國萬戶)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密直使)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상호군(上護軍) 김공이 표(表)를 받들고 원나라에 하례(賀禮)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에 걸려 신안(新安)의 여관에서 죽었다.
이달 경진(庚辰)일에 영구(靈柩)가 역마(驛馬)로 운송되어 서울에 들어와서 ●고류동(孤柳洞)에 있는 사저(私邸)에 빈청(殯廳)이 마련되었다. 다음 달인 四월 병신(丙申)일에 묵동(墨洞)의 북쪽 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아아! 공의 휘(諱)는 승용(承用)으로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고호>가 본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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