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87---충렬공 거주지4 (만년 본댁 개성 앵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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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5 22:18 조회1,394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께서는 1300년 개성 앵계리에 있던 본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만년에는 앵계리에 거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규보의 시를 보면 앵계리 주변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앵계초당(鶯溪草堂) 앞에는 용수산(龍首山) 곡령(鵠嶺)이 있고, 남쪽에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일컬었고, 창문으로는 보제사(普濟寺)가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 충렬공 묘지명 (1300년 이진 撰)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 충렬공 행장 (1350년 안진 跋)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 동국이상국전집 제5권
앵계(鶯溪)에 거처를 정한 뒤 우연히 초당(草堂)의 한적한 풍경과 두 집안이 서로 오가던 정의를 아울러 서술하여 서편 이웃에 있는 양 각교(梁閣校)에게 주다
앵계에 와 거처하니/鶯溪來卜宅
곡령이 마루에서 마주 보이네/鵠嶺正當軒
늙은 전나무는 남쪽 골목에 울창하고/老檜森南巷
***이 마을에 늙은 전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회동(檜洞)이라 하였다.
푸른 소나무는 조그만 담장에 덮였네/靑松覆小垣
***정원의 네 그루 소나무가 담장에까지 뻗쳤다.
상마는 들에 가득하고/桑麻饒野壟
울타리는 산마을을 실감케 하네/籬落似山村
창문은 선궁의 탑을 마주 보고/窓對禪宮塔
***보제사(普濟寺)를 가리킨 것이다.
정각은 주점 문에 임해 있네/樓臨酒店門
복숭아나무 옆에 푸르른 대를 심고/傍桃栽翠竹
가시나무 베어내고 꽃다운 향풀을 보호한다오/剪棘護芳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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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앵계초당(鶯溪草堂)에서 우연히 쓰다
도안에 분향하며 황정경을 읽으니/焚香道案讀黃庭
하루 종일 대사립 두드리는 사람 없다/竟日無人?竹?
천 수 시에서는 부귀에 오만하고/千首詩中驕富貴
거문고 한 곡조에 회포를 기른다/一張琴上養襟靈
용산의 새벽 안개 비보다 짙고/龍山曉霧濃於雨
곡령의 밤 봉화 별만큼 멀다/鵠嶺宵熢遠似星
***앞에 용수산(龍首山) 곡령(鵠嶺)이 있다.
새벽달 희미한데 취한 꿈 깨려 하니/醉夢欲回殘月白
찬 마루에 앉아 솔 그림자 본다/坐看松影落寒廳
▣ 고려사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연복사(演福寺) : 도성 중앙에 있는데, 옛 이름은 보제사(普濟寺)이다. 큰 전각을 능인전(能仁殿)이라 하며 그 앞 문을 신통문(神通門)이라 한다. 5층 누각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므로 지금 성중의 부자 상인이 재물을 내어 고쳐 지어서 채색[金碧]이 휘황하고, 종소리와 목탁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린다.
○ 권근(權近)의 탑중창기(塔重創記)에, -----
연복사는 사실 도성 안 시가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호칭은 당사(唐寺)이다. 방언(方言)에 당(唐)은 대(大)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한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채에 이르며, 안에 3개의 못과 9개의 우물을 파고 그 남쪽에 또 5층 탑을 세워서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었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옛 책에 갖추 적혀 있으므로 여기서는 덧붙여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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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황도 개경] 144page에는 불화(火)두개 밑에 민갓머리 밑 새조를 써서 ★앵계(鶯溪)라고 했다.
-본문 - 전략.. 십자가의 동서 방향 도로를 따라서는 ★앵계(鶯溪)하고 불리는 개천이 나란히 흐르면서 운치를 자아냈으니, 한양의 종로거리와 나란히 흐르는 청계천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후략
[고려의 황도 개경] 118page에는 조개패밑새조 ★앵계방( 0溪坊) ★앵계문( 0溪門)이라고 썼다.
-본문 (118page)- 전략
그렇다면 각 부는 정확하게 어떻게 경계지어졌을까?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중부는 시전.사원을 비롯한 별궁.객사.관청 등 여러 공공시설이 밀집해 있어서 도성 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중부에 위치를 추정할 만한 곳은 유암방인데, 이곳은 동서 방향 대로의 북쪽인 유암산 부근으로 비정된다.. 또한 ★앵계방(0溪坊). 광덕방등은 나성의 서남쪽 성문인 ★앵계문( 0溪門). 광덕문과 일치하고 있어서 이 일대가 서쪽의 경계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후략
[고려의 황도 개경] 40page에는 불화밑 앵자 鶯溪坊, 鶯溪門이라되어 있다.
본문 (40page) 전략 위치는 불명확하지만 5부방리의 명칭이나 물의 흐름과 비교하여 그 방향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영창문(영창문)과 동부의 영창방(영창방), 홍인문(홍인문)과 동부의 홍인방, 덕산문(덕산문)과 남부의 덕산방, 덕풍문(억풍문)과 남부의 덕풍방(덕풍방), ★앵계문(鶯溪門)과 중부의 ★앵계방(鶯溪坊), 건복문(건복문)과 서부의 건복방(건복방)등이 명칭애서 서로 비교된다. 후략
결론;
이러한 근거를 종합하면, [묘지문]에쓴 글자 [0]자나 [고려의 황도개경]에서
두가지(40page, 144page에는鶯, 118page에는 [0] )글자를 자전에서 찾어보면
두 글자 모두 꾀꼬리앵 이라고 되어 있으니 글자의 차이는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충렬공의 본댁은 황도 남서부에 위치한 ★앵계문일대인 ★앵계방의 ★앵계리임에 틀림없다.
또 [고려의 황도 개경] 169page에는 개성의 지도와 함께 동네마다 유명한 인물의 거주지가
표시 되어있는데
★앵계리에는 이규보, 유자우, 김방경,
서재동에는 김구용,
철동(수철동)에는 이제현...등 확실하게 표시 되어 있다.
개성부(開城府)
★앵계(鶯溪) : 지안방(智安坊)이 있다
두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오공산(蜈蚣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용수산(龍首山)에서 나와 대천교(大川橋)에 이르러 합류하여
동쪽으로 개성부(開城府)앞을 지나 ★앵계(鶯溪)가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예성강이 된다.
이규보(李奎報)의 글에 "★앵계에 와서 집자리를 정하니 ★곡령(鵠嶺)이
바로 난간에 당한다" *★곡령은 송악(松嶽)의 옛이름
개성부(開城府)는 동,서,남,북,중부로 크게 5부(部)로 나누고
35방(坊)으로 정하였는데 ★앵계방은 중부에 속하였으며
★곡령(鵠嶺)과 왕륜사(王輪寺)가 있다
이규보의 시에
문(門)이 천이요, 호(戶)가 만인데
비늘처럼 엇물리고 빗처럼 나란하며
둘러싼 형세는 용이 일어나고 봉이 춤추는것 같다
성중(城中)의 1만집은 벌(蜂)들이 모인것 같고
길가는 1천사람들 개미가 달리는것 같구나
무성한 상서로운 구름은 임금 궁궐을 둘렀고
푸릇 푸릇한 왕기(王氣)는 하늘문을 끼고 있네
곡산(鵠山)의 형승(形勝)이 용이 서린듯 하니
여기서 부터 황도(皇都)의 줄기와 뿌리가 굳어 졌도다
이색(李穡)의 시에
백이산하(百二山河)는 곡봉(鵠峰)을 껴않았는데
견여(肩輿)타고 곧장 팔선궁(八仙宮)으로 올라가네.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곡령(鵠嶺)을 등지고 ★용수산(龍首山)을 끼고서
사방이 모여드는곳.....이하중략
이제현(李齊賢)의 ★곡령춘청(鵠嶺春晴)의 시에
여덟신선의 궁전에 아름다운 취미봉(翠微峰)이 있어
아득한 구름과 안개가 몇만겹인가....이하중략
김구용(金九容)의 소쇄산천활화개(瀟灑山川活畵開)의 시에
연기가 비끼고 산아지랑이 부드러워 누대(樓臺)를 숨겼는데
소쇄한 산천은 살아있는 그림같이 펼쳐졌네
아침해가 구름위로 올라오니 빛이 더욱 찬란하고
개인구름이 땅에 낮게내리니 그림자 흔들거린다
동쪽으로 달리고, 서쪽으로 달리는 의관(衣冠)들은 성하고
만호천문(萬戶千門)은 붉고 푸른 무더기네
이나라의 허다한 호걸들이 가련하다
누가 세상을 건질 재주를 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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