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93---충렬공 성품6
페이지 정보
일송정 작성일04-08-17 11:24 조회1,480회 댓글0건본문
■ 충렬공 묘지명 (1300, 이진 찬)
공(公)께서 재직(在職)시에 항상(恒常) 밤에는 일찍 주무시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시고 이내 수레에 오르시기를 전과 다름없이 한결같이 하였으며 나라의 안위(安危)에 대하여 항상(恒常) 염려(念慮)하셨다.
---
아! 슬프다. 난(難)을 구원(救援)하고 백성(百姓)을 구제(救濟)하고 나라를 다시 편안케 하였으니 덕(德)이 그 하나요, 연세 89세에 돌아가시니 수(壽) 또한 하나요, 상국 도원수(上國都元帥)로서 작(爵)을 더 봉(封)하였으니 벼슬이 또하나이다. 세 가지가 다 구비(具備)하고 결함이 없는 것은 대개 실지(實地)대로 기록(記錄)할 뿐이오, 과장해서 찬미(讚美)하는 것은 아니다.
---
공(公)께서 연세가 90이 되셔도 홍안(紅顔)소년(少年)같고, 손자(孫子)의 손자(孫子)를 생전(生前)에 보셨으니 이는 또한 특이(特異)한 일이로다. 무릇 전쟁(戰爭)을 할 때에도 항상 원(元)나라 군마(軍馬)와 더불어 출입(出入)응대(應對)함에 있어 오로지 법(法)에 의해서 처리(處理)하였으며, 비록 온화(溫和)스럽게 하면서도 친압(親狎)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비록 항거(抗拒)하여도 노(怒)하지 않았으며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않고 죽음이 옳다고 생각하면 삶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하나 하나의 공업이 모두 녹권(錄券)과 국사(國史)에 실려 있음으로 여기에서는 자세(仔細)히 말하지 않고 다만 대강(大綱)만 기록(記錄)하노라.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직(忠直)하고 신의(信誼)가 돈후(敦厚)하며 기량(器量)이 크고 식견(識見)이 넓어서 사소(些少)한 일에 구애(拘碍)되지 않으며 엄(嚴)하고 굳세고 과묵(寡默)하여 비록 자질(子姪)들이라도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도 또한 능(能)하여 기골(奇骨)이 보통이 아니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병(病)이 없고 잠이 적으며 늙으셨어도 머리가 희지 않았다.
자신(自身)을 살펴서 근검하고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으셨으며 세수할 때에는 한 사발 물을 더 쓰지 아니하셨다.
벗들을 잊지 않고 상사(喪事)가 나면 바로 가서 조문(弔問)하며 의식(衣食)은 화려(華麗)함을 배척하였으며 손님이 오면 친소(親疎)의 구별(區別)없이 대접(待接)을 극진히 하고
평생(平生)에 임금의 실책(失策)은 말하지 않았으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퇴관(退官)해 계셔도 언제나 걱정하시고 큰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초청(招請)을 받아 가시며 큰 회의(會議)가 있으면 반드시 공(公)을 불러 의논(議論)하였고 매년(每年)정초(正初)에는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먼저 와서 배례(拜禮)하였다.
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김민성)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하루는 왕에게 요청하여 고향 땅에 성묘하러 가게 되었는데 왕은 그의 아들 김순(恂)을 태백산 제고사(祭古使)로 임명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친구들의 만류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들더러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 들일 때가 되였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옛예식을 많이 알았으므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어 내었고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친구들을 잊어 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곧 조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현직에서 물러가 한가롭게 된 이후에도 나라일을 집안일 근심하듯 우려하였고 무슨 중대한 문제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김방경에게 물어 보았다.
▣ 고려사절요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 8월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방경은 안동(安東) 사람으로, 성품이 충성스럽고 곧으며, 미덥고 후덕하며, 엄하고 굳세며, 말이 적었고, 국량이 넓고 커서 소절에 구애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문제를 잘 처결하였고, 근검함으로써 자신을 단속하고, 옛 친구를 잊지 않았다.
비록 치사한 뒤에 한가롭게 있으면서도 나라를 집안일처럼 걱정하였으므로, 나라에서도 큰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나이 89세에 이르도록 머리털이 세지 않았고, 기골이 보통 사람과 달라 추위와 더위에도 앓는 일이 없더니, 마침내 휙 가버렸다.
■ 동안거사집 (이승휴 著, 삼척시 번역 간행)
단모부(旦暮賦)
---이해 11월 12일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첨의령 충렬공)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충선왕)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
우리 공과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패왕(覇王)을 보필할 만한 영특한 재능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갔는데 험한 파도가 용솟음 쳤으나 뱃머리는 그 어지러운 것을 헤치고 나아갔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 말발굽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그래서 해외(海外)의 다른 나라에 우리 나라의 무공을 드날려, 조공(朝貢)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하여 천자에게 승첩을 바쳤다. 사해의 군주이신 황제가 헌함에 기대어 돌아보고 물었는데, 위엄스런 얼굴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재량껏 대답하는 논변을 발휘하여 또다시 천자의 장려를 입게 되었다. 비록 소백(小伯)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은 것과 진후(晉候)가 세차례 천자를 뵈러 간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 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三達尊), 녹야당(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구중궁궐에서는 공신에 봉하여 대려의 잊기 어려운 맹세를 돈독히 했고, 온 나라에서는 '아형(阿衡)만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겠는가?'라는 감탄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그 나이가 높을수록 그 덕은 더욱 높다 하겠다.
---
그 사(辭)는 다음과 같다
---
춘추가 80에 4년이 지났도다.
정신은 맑고 기운은 장대함이여, 몸은 기력이 강건하였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으니,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도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