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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92---충렬공 성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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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7 11:22 조회1,6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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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제106권 - 열전 제19 >
이주
〔이행검(李行儉)의 기사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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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오래 근무하다가 지홍주사(知洪州事)로 파견되어 갔는데 삼별초의 반란 때에 적들에게 붙잡혔다. 적들이 그에게 관리의 선발, 임명 사업을 맡게 하였는데 ●김방경이 반적들을 격파하자 ★이행검이 그의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의 문생(文生)이 된다 하여 이행검을 살려 주었다. 그 후 청주(淸州), 곡주(谷州-곡산), 풍주(豊州)의 세 고을에서 수령으로 있었는데 청렴하고 정치가 간결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 김순 묘갈 번역문
(출전 : 안양문화유적총람/안양시 문화공보담당관실/1996.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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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그러므로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지원(至元) 十六年 춘계과장(春季科場)에서 금방 부장원(金榜 副壯元)으로 급제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섭랑장(攝郞將)에 임명되더니 후에 다시 국학직강(國學直講)이 되시니 이는 공이 능히 부친의 유한(遺限)을 펴신 것이다.

이로부터 부친께서는 막내 아들을 더욱 사랑하여 항상 신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하정사(賀正使)로 가실 때도 꼭 데리고 다니셨으나 다만 일본을 정벌하러 가실 때는 따라오지 못하게 하신 것은 종군하여 위태한 일에 참여치 못하게 함이었다.
공이 이에 출정행차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먼저 군함에 올라타고 갔는데 마침내 부친을 호위하고 구원(救援)한 공(功)이 자못 컸으니 이는 공이 오로지 충효로서 발분(發憤)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임오년(壬午年)에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승진하고 그 이듬해에 상주판관으로 나가서 선정(善政)한다는 소문이 들어오니 일년도 못되어 불러들여---



■ 福州(今安東) 映湖樓 /안동 영호루를 지나며
---충렬공 김방경

山水無非舊眼靑 /산천은 변함없이 옛모습 그대로 있고
樓臺亦是少年情 /루대도(복주루를 말함) 또한 소년시절의 정이 그대로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고국은 아직도 옛풍습 그대로 남아있고
收拾絃歌慰我行 /아름다운 거문고소리와 노래는 나의 갈길을 위로해 주도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승상 안중(安重)은 본래 우리 나라에 유익되는 일을 해 준 일이 있는 자인데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재상이 보내 준 것이 아닌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에는 국가적 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이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충렬공 54세, 1265년1월-5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치었다.



■ 《고려사》 제121권 - 열전 제34 > 효우 >
김천
김천은 명주(溟州) 아전이며 아명은 해장(海莊)이다.
고종 말년에 몽고병이 침범하였을 때 그 모친과 동생 김덕린(金德麟)이 포로로 잡혀 갔다. 그때 김천이 나이는 15세였는데 밤낮 울며 지내다가 잡혀 간 사람들이 도중에서 다수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친 상을 예법대로 지켰다. 그 후 14년에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란 자가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장마당에서 사흘 동안이나 ‘명주 사람 있소!’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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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말에 태우고 김천은 도보로 따라왔으며 김덕린은 동경까지 배송 와서 울면서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따라가지 못하나 하늘의 복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자가 서로 안고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때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로부터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이르러서 김천의 모자를 불러 보고 칭찬과 감탄을 마지않았으며 ★원나라 총관부(摠管府)에 부탁하여 증명서를 교부하며 식사와 숙사를 제공받으면서 귀국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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