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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96---충렬공 영정3 (벽상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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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8 16:00 조회1,7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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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壁上功臣에 책봉되셨으므로(1283년:묘지명, 혹은 1307년:행장,고려사열전) 공신각(능연각 이라고도 함)에 충렬공의 畵像이 걸렸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충렬공 묘지명 (1300, 이진 찬)

계미(癸未1283)년에 또다시 소장(疏章)을 올려 퇴임(退任)할 것을 간청(懇請)하니 왕은 부득이하여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中重大匡判都僉議事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를 더 봉(封)하고 이내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http://iandongkim.com/bangyeng33.jpg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왕(王)이 또한 후회(後悔)하고 충렬왕(忠烈王) 33년 정미(丁未=1307)년 6월 14일에 왕(王)이 영지(令旨)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故 上洛公 金方慶)은 공(功)이 많은지라 대려(帶礪=黃河의 띠(帶)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낮아지도록 오래라는 뜻)와 같이 잊어버리기 어렵다."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追贈)하고 충렬(忠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왕명(王命)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9년에 또다시 글을 올리어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추청 정난 정원(推忠靖難定遠)공신, 삼중 대광 첨의 중찬, 판전 이사사, 세자 사의 관직을 띠고 치사(致任)하게 하였다.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충선왕 때에 그를 선충 협모 정난 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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