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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掛燈穴은? 金士衡과 申孝昌 음택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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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08-19 12:54 조회1,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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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풍수지리연구소의 碩礎 채영석선생께서 익원공 묘소를 답사하고 남긴 기록이        
있어 소개합니다.
왜 사위인 신효창의 묘가 익원공 할아버님 묘 앞에 위치 하는 것일까요?        
작년 익원공 할아버님 묘소 참배시에 궁금했던 사항입니다.
같이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진짜 掛燈穴은? 金士衡과 申孝昌 음택답사기        
                  
                                                                          碩礎  채 영 석
                
답사지를 향한 차량은 상큼한 공기를 가르며, 회색아파트 단지들이 밀집된 강변로를        
달린다.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를 지나서, 암사동을 지나치자, 한강변에 있는 조정        
경기장의 경정(競艇)과 함께, 도로 우측으론 미사리(渼沙里) 카페촌의 열정을 담은         
간판들이 시야를 정복해 버린다. 예전에는 고깃집과 횟집들이 성황을 이루었는데,        
96년 후반부터 카페와 레스토랑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라이브공연의 물결과 함께         
욕망이 분출하는 이색지대란 대명사를 얻고있다. 심야 데이트코스로 각광을 받는 이        
곳은 건물형태들이 모두 서구식의 이국적 표정을 담고있어 처음 본 사람들은 마치         
외국에 온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함께 동행하는 김명식 고문 왈 "커피와 음식값은        
보통 비싼 것이 아니어" 라고 한 말씀 덧붙인다.         
                
그림처럼 펼쳐지는 팔당호를 지나고 시원하게 달리던 차량은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        
한 양수리 다리를 지나서, 아직도 예전처럼 번잡하다고 느껴지는 양수리 시내로 진        
입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큰 젖줄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합궁(合宮)을 하는        
두물머리(兩水里)는 한 물길은 강원도 땅 금강산(1,638m)에서 시작하여 휴전선을         
넘어와 북한강이 되었고, 다른 물줄기 하나는 태백산 금대봉(1,418m)의 검룡소(儉龍        
沼)에서 시원(始原)하여 남한강이란 이름으로 이곳에서 만나 두 물길이 함께 몸을 섞        
은 다음 잠시 가쁜 숨을 고른 후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예전의 우리 조상들은 물이 차        
갑고, 거세며, 물빛이 푸른 북한강을‘숫물’이라 하고, 따뜻하고 순하며, 붉은 색을 띠        
는 남한강을‘암물’이라 하여 양수리에서의 어우러짐은 음양(陰陽)의 조화(調和)라         
하였다.         
                
두물머리 강변에는 전설이 있는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데, 400년 전부터 이        
곳에 뿌리를 내리고, 남한강과 북한강의 강줄기를 따라 한양을 오가던 나그네들의         
애환과 함께 그들의 이정표가 되어준 노거수(老巨樹)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        
를‘도당할아버지’라 칭하고, 매년 가을이면 젯상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        
제(堂祭)를 지내왔었다. 그런데, 도당 할아버지의 배필인‘도당 할머니’는 1974년 팔        
당호의 담수시 수장(水葬)되어, 현재는 홀아비로 남아있다고 한다.         
                
양수리를 안은 양평군 양서면은 면적 59. 59㎢ 로, 인구는 약 9,500명 정도이고, 최근        
에 아파트 등이 건립되면서 인구수가 늘어나는 추세다. 북쪽에는 서종면(西宗面)이,        
동쪽은 옥천면(玉泉面)이 자리를 잡았고, 서쪽 북한강 건너로는 남양주시 조안면(鳥        
安面)에 접하였다. 또한 북부에는 청계산(淸溪山: 658m)과 형제봉(兄弟峰)이, 남부        
에는 부용산(芙蓉山: 366m)이 띠를 두르듯 연결된다.         
                
구 정승 골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1차선의 좁은 농로를 양방향의 차량들이 간신히 교        
차가 이루어지는 길인데, 맞은편의 차량과 마주칠 때면 한쪽 도로변으로 바짝 붙여         
반대편 차량이 통과할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         
김사형 선생의 묘소로 들어가는 길과 함께 나란히 달리고있는 우측계곡에는 잔뜩 멋        
을 부린 반월형의 구름다리가 요소 요소마다 계곡위로 걸쳐있는데, 각 문중마다 계        
곡 물을 직접 건너지 않고도 자기네 조상 묘의 진입이 용이하도록 설치해 놓았다.        
한 참을 더 달려서 선생의 묘소가 있는 목양골에 도착하여 차량에서 내리자 계곡건        
너로 산뜻하게 단장한 솟을대문과 함께 제실(祭室)앞에는 여러 기의 신도비가 즐비        
하게 세워져있다.         
                
계곡 구름다리를 건너 선생의 사위인 신효창(申孝昌)을 기리는 평산 신씨들의 제실        
과 신도비를 둘러보고, 제실 담장을 낀 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타고 묘소로 오르는데,        
묘역보다는 한참 아래가 되는 길 우측에, 진응수(眞應水)처럼 느끼게되는 연못 하나        
가 보인다. 지하의 생기(生氣)는 동반하는 물과 함께 용맥을 타고 흐르다가 용맥이         
상분(上分)하는 아래에다 혈(穴)을 맺게된다. 혈을 맺고 남은 여기(餘氣)가 극히 왕        
성하여 다시 하합(下合)되는 지점에서 용출(湧出)되는 물을 진응수라 부르는데, 산        
세가 강한 증거로, 그 물이 맑고 수려하면 재복(財福)이 크다고 본다.         
경사가 조금은 가파른 비탈길을 타고 오르니 좌측으로, 아랫쪽 신씨네보다는 규모가        
작은 선생의 가문인 안동김씨의 제실이 나타난다. 아마도 선생의 후손보다는 사위        
의 자손들이 더 번창하였거나, 아니면 신씨네 후손들이 더 공을 들여 조상을 모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시 산길로 오르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남의 밭에서 두리번거        
리는데, 마침 길 옆에서 김을 메던 아낙 한 분이 우리 일행에게 한 말씀 던지신다.        
"멀쩡한 길을 두고, 왜 남의 밭을 밟고 다니세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도망치듯        
빠져 나와 밭 위로 난 숲길을 타고 부지런히 오른다.         
                
묘소 뒷길을 타고 묘역으로 오르니 전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면서, 좌우의 산등성이        
와 앞쪽의 육중한 산자락이 모두 내 발치 아래로 놓인다. 꽤 높게 위치한 묘역에는         
모두 둥그렇게 둘레석을 두른 두 기의 봉분을 앞뒤로 나란히 조성해 놓았는데, 앞에        
있는 묘소가 사위인 신효창의 묘이고, 뒤가 선생의 묘소다. 나이 67살에 선생이 운명        
을 하자, 세종조 때 풍수학인 최양선과 함께 지리학에 상당한 수준 급의 반열에 올랐        
던 사위 신효창이 점혈(占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두대간룡(白頭大幹龍)이 남으로 내려오다가 추가령(楸哥嶺)에서 한북정맥(漢北正        
脈)을 분지하고, 남진(南進)하던 간룡(幹龍)이 온 힘을 쏟아내어 설악산(雪嶽山)을         
솟구친다. 오대산(五臺山, 1.563m)에서 그 힘을 재충전하여 서쪽으로 맥을 뻗어가다        
이곳 혈장의 증조산(曾祖山)이 되는 용문산(龍門山, 1.157m)을 치켜세운다. 용문산        
을 출발한 용맥은 큰 몸뚱이를 좌우상하(左右上下)로 뒤틀면서 행룡하여 조산(祖山)        
인 중미산(中美山, 834m)을 일으키고, 다시 굽이치면서 달려나와 주산(主山)인 청계        
산(淸溪山)의 청제봉(靑帝峰)을 작봉(作峰)하였다.         
        
주산(主山)에서 봉황(鳳凰)이 날개를 쭉 펴듯 좌우로 분맥(分脈)되는 여러 겹의 청룡        
과 백호능선을 만들고, 주봉을 출발한 중출맥(中出脈)은 아래로 내려와 무곡성(武曲        
星)의 소원봉(小圓峰) 하나를 솟구친다. 여기서 급하게 쏟듯 내려온 주룡(主龍)이 산        
중턱 쯤에서 급하게 몸을 곧추세워 이곳 혈장(穴場)을 일구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등잔에 호롱불을 걸어놓은 듯한 괘등혈(掛燈穴)이다. 혈장(穴場)의 폭이 협소하고,         
약간 길다랗게 결응(結應)하여 두 기의 묘소를 작국(作局)하였다. 중앙의 혈판(穴坂)        
을 따라서 약간 거리를 두고 호종(護從)하던 용호(龍虎)는 병풍처럼 팔을 벌려 등불         
혈장을 보호하여, 불꽃이 바람에 타지 않도록 조밀하게 감싸주니, 그 불빛은 만인(萬        
人)을 향해서 빛을 발한다. 등잔불은 자손만대에 걸쳐 영화(榮華)와 명예를 기약하고        
, 그 영험을 받은 후손들은 대대(代代)를 걸쳐 내려오는 동안 귀인(貴人)과 현자(賢者)        
를 다수 배출해낸다.         
                
두 기의 묘소를 오가면서, 간심(看審)을 한다. 내룡(來龍)이 우선룡(右旋龍)하여 입        
수일절(入首一節)은 진방(辰方)에 머리를 파묻는 관대룡(冠帶龍)이다. 앞쪽의 미끈        
하게 생긴 안산에 향을 댄 을좌신향(乙坐辛向)은 좌수도우(左水到右)하여 출수(出水)        
하는 건파(乾破)가 되어 팔십팔향법의 정묘향(正墓向)이 되었다. 자손이 흥왕하고,         
대부대귀(大富大貴)하여 수복(壽福)을 겸전(兼全)하는 합당한 향법(向法)이다. 그리        
고, 사국수법(四局水法)에 의한 병득수(丙得水)는 벼슬이 최고위에 오르고, 재산은        
거부(巨富)가 된다는 합당한 수법(水法)이다. 또한 건방(乾方)의 파구(破口)는 12포        
태법의 절태(絶胎)가 되는 녹존방(祿存方)을 치고 나가, 금어(金魚, 4품 이상의 관리        
가 관복에 부착하던 붕어처럼 생긴 황금빛 주머니)를 관복에 차게되는 녹존유진패금        
어(祿存流盡佩金漁)가 되어 자손들이 큰 벼슬길에 오른다는 합당한 수법이다.         
                
앞쪽의 후덕하리만큼 잘 생긴 안산(案山)은 후손들에게 풍요로움을 약속하고, 멀리         
조산(祖山)으로 서서 옹호(擁護)하는 태방(兌方)의 예봉산(禮峰山)은 정자관(程子冠)        
을 머리에 쓴 것처럼 청수하고 아름다우니 후손 중에 정승벼슬을 기약하기도 한다.        
예봉산 좌측의 배알미산(拜謁尾山)과 우측의 운길산(雲吉山)도 다정하게 팔을 벌려        
감싸주니, 주변의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 많은 인물의 배출을 예고한다.         
        
선생에 대한 기록은 선생이 운명한 1407(태종 7)년 7월 30일 자 태종실록에 잘 나타        
나 있다.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이 졸(卒)하였다. 김사형의 자(字)는 평보(平        
甫)인데, 안동부(安東府)사람이다. 대대로 귀하고 현달하여, 고조(高祖) 김방경(金方        
慶)은 첨의중찬(僉議中贊) 상락공(上洛公)으로서, 문무 겸전의 재주가 있어 당시의         
어진 재상이었고, 조부(祖父) 김영후(金永煦)는 첨의 정승(僉議政丞) 상락후(上洛侯)        
였다. 김사형은 젊어서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 가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대신        
을 나누어 보내 각 지방을 전제(專制)하게 하였을 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交州江        
陵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되어 부내(部內)를 잘 다스렸다...........(중략)        
        
김사형이 조준과 더불어 8년 동안 함께 정승노릇을 하였는데,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        
하여 거리낌없이 국정(國政)을 전단(專斷)하였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묘당(廟堂)을 진압하니, 물의가 의중(依重)하였다. 주상이 즉위하자,        
신사년 3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임오년 10월에 사임하고, 영사평부        
사(領司平府事)가 된지 달포가 지나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사제(私第)로 은퇴하        
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조회를 3일간 정지하고, 좌부대언(左副代言) 윤수(尹須)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翼元公)이라 하였다. 두 아들은 김승(金陞)과 김육        
(金陸)이다.         
        
간산평(看山評)이다. 풍수에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사위 신효창이 점혈(占穴)했다는        
선생의 묘소가 아이러니 한 것은 아들 김육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하였지        
만, 아들 김승은 선생이 조정에서 하사 받았던 식읍(食邑, 조세를 거두어 쓰게 하던         
고을) 1천 호와 식실봉(食實封, 조세와 부역 전부를 소유할 수 있는 민호) 3백 호(戶)        
를 상속받아 떵떵거리며 살고있었는데, 아무리 사위의 신분이라 하더라도 가문이         
다른 신효창의 사후지지를 선생의 묘 앞으로 정한 점이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괘등혈은 전면의 불빛이 앞으로 더 멀리 비추는 것 말고도 뒷쪽의 불빛을 간접 차단        
하므로 써 선생보다는 신효창의 후손들이 발복을 더 이룬 것으로 보인다.         
답사를 끝내고 언덕바지를 내려오면서 숲 속에 가려진 혈장을 자꾸 뒤돌아보며,         
여운을 가시지 못한다. 선생보다는 사위의 묘소가 정혈처(定穴處)에 가깝다고 느껴        
지지만, 현장상황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것은 옛 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 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해법을 얻지 못한 길옆의 진응수와 함께 음택지 연구목록        
에다 기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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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수에서 본 익원공(휘 사형)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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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원공 묘(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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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원공 묘(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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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형, 신효창 묘(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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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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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룡        
                
                
碩礎 채영석선생은        
조부 (풍수학인: 居屈 채도묵) 로부터 漢學, 周易, 地理,卜筮 등 專修,        
한국역리학회(지창룡 선생, 명리및 지리학 入門),        
대한풍수지리학회(김대은 선생, 이기론 專修), 한국역리학회(중앙본부 중앙위원),        
현재 한국풍수지리연구소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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