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님의 가첩 개략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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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20 16:41 조회1,767회 댓글0건본문
12) 판교공 김환(金丸)
지주사공의 아들인 환(丸)은 안렴사공 이래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파묻고 봉분도 하지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그리고 자손 중에서 고려조에 이미 벼슬하였던 사람은 다시는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말라." 는 충절의 유훈이 이어져오는 상대(上代)의 고향인 오근(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 땅으로 이거한 후 1442년(세조 임술년) 친시(親試)에서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여 한림주서를 거쳐 승문원판교에 이르렀다.
13) 참의공 김종손(金宗孫, 1428∼1478)
丸의 아들 宗孫(1428∼1478)은 1447년(丁卯)에 음사로 벼슬에 나가 사헌부감찰에 이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宗孫의 아들 城(1451∼1487)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여러 고을의 군수를 맡았으며, 1487년 홍치황제등극 진하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가셨다가 통주(通州)에서 졸하시니 병조참판에 증직되시고, 자손들이 귀해짐으로 인하여 여러 번 높은 품계를 추증받았다.
14) 안원군 김공량(金公亮, 1472∼1544)
城의 아들로 안원군파의 파조가 되는 公亮(1472∼1544)은 안렴사공의 7세손으로 자를 필지(弼之) 호를 양곡(楊谷)이라 하였으며 증직으로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받았고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올라 안원군(安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공은 묵재(默齋 李深源, 1454∼1504)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문과 덕행이 순결(純潔)하고 아름다웠는데, 연산조때 절제과로 등제하였으나 스승과 뭇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전시(殿試)에 나가지 않고 세사(世事)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고요히 지내셨다.
묘는 경기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고, 묘갈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짓고 동고(東皐) 김로(金魯, 1498∼1548)가 썼다. 정사룡의 문집 [호음잡고](湖陰雜稿)에 <유명조선국김군공량묘갈명>(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이 실려 있고,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었다. 안원군의 묘갈을 書한 로(魯)는 우리 가문의 서운관정공파 희수(希壽)의 아들이며 당대의 명필로서, 이외에도 승지공 김공예(金公藝, 1485∼1537) 묘갈, 아버지 김희수(金希壽, 1475∼1527) 묘비를 書하였다.
○바로 이 안원군 公亮의 직계 사손들이 세거해 온 곳이 바로 소정면 운당리이다. 안원군파가 처음으로 연기땅에 연고를 맺은 것은 바로 안원군의 아들인 진천현감 완(浣)때 였다고 전해진다.
구전되는 바로는 안원군이 전의현 덕평면 운당리·원덕리 (현 소정면 운당리) 일원의 토지와 임야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아 아들인 진천현감 浣에게 관리토록 함에 이때부터 안원군계의 가문이 이곳을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운당리에 영장댁(호준) 맞은 편에 있는 하마(下馬)터로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 역시 사손파 안동김씨의 위세를 말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재 17대손까지 거주하고 있으며, 사손인 龍植(1936생)의 주관으로 1995년 운당리에 진천현감공 이하 모두 15대 34위의 장자·장손의 묘소를 이장하여 모시고 있다. 묘소입구에는 해방이후 이전한 안원군파 재실이 있다.
15) 김완(金浣)
안원군 公亮에게는 모두 3子(완,척,주)가 있었는데, 장자인 진천현감 浣은 자를 정숙(靜叔)이라 하였고 진천현감을 지냈으며 증직으로 좌승지를 추증받았다. 부인은 안동강씨이고 묘소는 율목동에 있던 것을 이장하였는데 이장시 명기(明器 : 조선시대 士族들의 묘소에 함께 묻는 부장품)가 출토되어 사손이 보관하고 있으며 목관과 복식도 그대로 출토되었다고 한다. 목관은 7자×8자반의 겹관으로 복식은 누비이불등의 고급 복식이 400년 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관끈도 그대로 보존되어 그 끈을 잡고 운구하여 이장하였다 한다.
차자인 척(滌)의 후손들은 전라도 광산으로 이거하였고, 3자인 주(澍, 1512∼1563)의 후손들은 경기도 여주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16) 김충남(金忠男, 1530∼1618)
浣의 아들인 충남(忠男, 1530∼1618)은 자를 서경(恕卿)이라 하였고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19) 생원시에 합격하여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교관에 올라 토산현감을 역임하였다. 89세로 장수하여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퇴계 이황의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실려 있다. 忠男은 아들이 없어 壽男(공량弟 公奭의 후손)의 子인 엽(曄)을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군위현감과 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7) 김정삼(金鼎三)
정삼(鼎三)은 안렴사공의 12대손이며 숙종조시 武科급제하여 선전관, 비변랑감찰, 함평현감, 낙안구수를 역임하였다. 1715년(강희54)에 세운 <군수김후정삼애민청덕선정비>(郡守金候鼎三愛民淸德善政碑)는 전남 순천시 낙안면 교촌리 낙안읍성 향교입구에 있다.
18) 김호준(金好焌, 1867∼1914)
정상(鼎相)의 가계에서 한말에 희수(喜秀 : 족보명 喜源)- 호준(好焌 : 족보명 榮澤)으로 이어지는 인물을 배출하였다. 喜秀(1821∼1878)는 음직으로 1878년 선공감가감역에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 好焌(1867∼1914)은 1886년(고종23) 무과에 갑과 1인으로 급제한 뒤 상서원주부, 훈련원판관, 첨정을 거쳐 토산병마절도제위, 그리고 1893년에는 용양위부호군으로 경주영장에 임명되어 안동지역의 동학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의 교지와 유품을 사손이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안동일대의 동학 토벌에 관련된 일기 [영가일기](永嘉記事)는 필초본으로 당사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줄 사료로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안원군파에서는 文科급제 1명(환), 生員進士급제 6명(충남, 원후, 인, 철, 정운, 정신), 武科에 21명(숙, 근후, 구, 언국, 명구, 숙, 현국, 명악, 명혁, 정삼, 중국, 명익, 영수, 주영, 좌국, 명준, 영택, 정서, 정덕, 사묵)이 급제하였다. 조선조 사마방목을 보면 忠男의 부친 완(浣)은 봉렬대부 行진천현감을, 元厚의 부친 엽(曄)은 통훈대부 行활인서별제를, 철( +喆)의 부친 명준(命峻)은 통정대부 行장연현감 해주진관명마절제도위를 지냈음을 알수 있고, 이외에도 안렴사공파 세보를 보면 구(石+求)는 구례현감을, 명혁(命赫)은 여산도호부사를, 정상(鼎相)은 경흥부사를, 좌국(佐國)은 다대첨사를, 정덕(鼎德)은 정평부사를 지내고 분무원종훈에 책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원군파 후손으로 在完은 1950년대에 지방의회의원과 교육위원회위원을 역임하였고, 在元은 근 30여년간을 오직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현재 태원, 재은, 호식은 사손 용식과 함께 종사일이면 남다른 정성을 보여주어 종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한 在龍(1956생)은 안렴사공 인터넷 홈페이지(http://hgdryj.hihome.com)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운당리에는 안원군파 외에도 안렴사공 후손이 많이 세거하고 있는데, 공석(公奭)후손 엽(曄)이 공량(公亮)후손 忠男의 양자로 들어올 때, 형 엽(曄)을 따라 이거해 온 담(曇)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으며, 1980년대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在益(1938∼1983)은 그의 후손이다. 또한 공언(公彦)후손 일파가 이거하여 세거하고 있으며, 漢植(1962생)은 현재 연기군의회의원(2002년 당선)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 내용은 <안렴사공파 세보>와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 책자를 저본으로 하여 몇가지 자료를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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