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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99---충렬공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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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0 09:36 조회1,4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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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충렬공의 배위와 자녀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배위 냉평국대부인(음평군부인) 죽주박씨 <*거서랑 지제고(起居郞知制誥) 박익정(朴益旌)의 따님>과의 사이에
3남(선,흔,순) 3녀(조변, 김원충, 권윤명에 출가)를 두시고 ◀김방경 묘지명(1300) 기록 ◀1300년대 광산김씨 김련-김진 호구단자 기록

2)
배위 손씨와의 사이에 1녀(채의에 출가) ◀김방경 묘지명(1300)기록
또는 용강 관비와의 사이에 1녀(채홍철에 출가)를 두시고 ◀고려사 기록 ◀채홍철 묘지명 (1340) 기록

3)
또 1녀(경수에 출가)가 있고 ◀족보 기록 (최초 기록 : 1580 경진보)

4)
경주가씨(가석윤의 따님)와의 사이에 2남(론,돈) 養育 ◀족보 기록 (최초 기록 : 확인중)



■ 충렬공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공(公)의 배위(配位)는 거서랑 지제고(起居郞知制誥) ★박익정(朴益旌)의 따님으로서 삼남 삼녀를 나셨으니
장자 ★선( )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典法判書上將軍)을 지내시고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차남 ★흔( )은 관고려군 만호 진국상장군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장군(管高麗軍萬戶鎭國上將軍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將軍)을 지내시고
삼남 ★순(恂)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密直司副使判秘書寺事文翰學士)를 지내시고
딸 한분은 참지성사 ★조계순(參知政事 趙季恂)의 2자(二子) ★변( )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변( )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전리판서(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上將軍)을 지냈다.
둘째따님은 지첨의부사 ★김광원(知僉議府事 金光遠)의 장남(長男)인 조헌대부 신호위 보승장군(朝顯大夫神虎衛保勝將軍) ★김원충(金元沖)에게로 출가하였고,
셋째따님은 통례문사(通禮門事) ★권윤명(權允明)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기후(通禮門 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 안동김씨 족보 (1580년 경진보)

1남 선(  )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 부인 순창설씨 봉 순창군부인 사재경 昴지녀
---여 나윤(羅允) 判事
---자 자(資) 宰臣 무후
---자 승용(承用) 등제 관지 선수 선무장군 만호 진국 밀직사 보문각 대제학 이廉稱부인元씨 판서 정(貞)지녀
---자 승택(承澤) 삼중대광 도첨의정승 부인김씨 봉낙랑군대부인 삼중대광 계림부원군 혼(琿)지녀
---자 승우(承祐) 尙書

1녀 조변(趙삼수변卞) 宰臣에 출가

2남 흔(  ) 고명 수(綏) 삼중대광 자의도첨의사사 습봉상락공 향년59 종부정탐라일본 계유공 합단란전 우연기대첩 성활달자혜 심휼친척궁자 이부유명 사만호 수형자승용 사견려사열
---여 민적(閔적) 宰臣에 출가
---여 조련(趙璉) 贊成에 출가

2녀 경수(慶綏) 判閣에 출가

3녀 권윤명(權允明) 宰臣에 출가

3남 순(恂) 자 귀후 향년64 등제 중대광 판삼사사 상락군 시문영 충렬공 정일본 공잠등주이종 성관후 공예서 만축성기일이?위락 사견여사 부인 양천허씨
---여 백이정(白이正) 宰臣에 출가
---여 별리불화(別里不花) 무후에 출가
---여 정책(鄭책) 청하군에 출가
---자 영돈(永旽) 小字 나해(那海)
---자 영휘(永暉) 宰臣
---자 사순(思順) 삭발 宗慈
---자 영후(永煦)



■ 안동김씨 족보 (1979 기미보)
冷平 국대부인 죽주박씨 (父 문하성 기거랑 지제고 박익정, 祖 형부시랑 박현구, 曾祖 복두점 녹사 박?개, 정신공 박충숙 7세손)

金方慶 할아버지는 5男( 선,  흔, 恂순,  윤, 惇순) 4녀(趙 조변, 慶綬경수, 權允明권윤명, 蔡洪哲채홍철)를 자녀로 두신 것으로 되어 있고,
---부기를 달면서 충렬공의 묘지석(1300년 이진 찬)을 발굴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朴益旌박익정의 따님인 냉평국대부인 竹州朴氏가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孫氏를 재취로 맞이하여 1녀를 낳아 蔡宜채의에게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역대세보에는 보이지 않으나 지석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기록하여 두고,
---慶州加氏가 2남을 기른 것은 지석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錫胤석윤의 따님인 경주가씨가 2남( 윤, 惇순)을 양육하였다. ***生2男이 아니고 育2男으로 표기. ( 윤, 惇순)은 한글로는 론, 돈인데 족보에는 한글로 윤, 순이라 되어 있다.



동문선 제50권  
찬(贊)  
고 호부상서 회곡거사 박공인석진 찬 병서(故戶部尙書檜谷居士朴公仁碩眞贊幷序)  
    
이인로(李仁老)

하늘이 담기(膽氣)를 부여(賦與)하여 기이한 신물을 냈으니 곧, 우리 계림(鷄林) 박공(朴公)이시다. 공이 일찍이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어,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왕경략(王景略)의 사람됨을 사모하였고 더욱이 사학(史學)을 좋아하여 한(漢), 당(唐) 이래의 일을 이야기하되 어제 본 것처럼 줄줄 내리 밀며 문장을 만드는 것은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의 체를 체득하여 물리(物理)에 숙달하고 음식과 복약의 일에 있어서도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또 활쏘기와 공치기[毬]까지도 능하여 비록 무관이나 숙장(宿將)으로도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공의 아끼지 않고 밖에 내보인 것에 불과하며, 그 속에 비장한 것은 또 얼마인지 알 수 없다. 공이 일찍이 난리를 피하여 남쪽에 노니다가 드디어 죽주(竹州) 회곡(檜谷)에 거처를 정하고 회곡거사로 호를 하고 무려 30년을 지냈는데 마침 진강공(晉康公)이 국정(國政)을 담당하게 되자, 공의 이름을 듣고 서울로 불러올리어 급히 크게 쓸 양으로 곧 한원(翰苑)에 꽂아 놓고 또 따라서 부채질하므로 10년이 못 가서 드날리어 팔좌(八座)에 올랐는데 세상에서는 오히려 정승이 못된 것을 불만히 여겼었다. 공의 휘(諱)는 인석(仁碩)이요 자는 수산(壽山)이니 중고의 이름난 재상 육화(育和)의 아들이다. 공이 죽은 뒤로 오랜만에 나는 공의 아들 어사[繡衣]군 서(犀)의 집에서 공의 우생(友生) 이사(李祀)가 그린 공의 상을 보고 구의를 느끼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감히 두 번 절하고 찬을 지어 정액(幀額)에 표한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천지가 어둡고 아득하여 / 天地晦冥
큰 고기 작은 못에 엎드렸더니 / 戢鱗汚池
세상이 맑고 도가 통태하여 / 世淸道泰
고운 새가 와서 춤을 추네 / 撫翼來儀
용이랄가 봉이랄가 / 龍耶鳳耶
나타나고 숨는 것도 때가 있네 / 隱顯惟時
유상을 한 번 보니 / 一覩遺像
전형이 여기 있네 / 典型在玆
머리에는 검정 사모 우뚝하고 / 頭岸烏紗
몸에는 학창의를 입었네 / 身披鶴氅
비록 화사가 특이한 것을 숭상하여 / 雖盡者之尙異
이런 도인의 의복과 야인의 얼굴을 만들었지만 / 爲此道裝與野狀
골격은 가려질 수 없어 / 骨格不可掩兮
때를 구제하고 세상을 경륜한 자의 상이 뚜렷하네 / 尙濟時經世者之相歟
사람이 그 겉만 보고 / 人敬其表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기에 / 莫揣孰是
이로써 찬하여 / 以是贊之
정수를 발설하네 / 發洩精粹
찬한 자는 누군고 하면 / 贊者云誰
거사의 성은 이가로세 / 居士姓李


동문선 제61권  

   서(書)  

   여 박시어 서서(與朴侍御犀書)  

    
이규보(李奎報)

모월 모일에 대복소경 보문각대제 지제고(大僕少卿寶文閣待制知制誥) 이모(李某)는 삼가 시어군(侍御君) 각하(閣下)께 글월을 올립니다.
사람이 서로 안다는 것은 서로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제가 평생에 사람들로부터 알아 주는 바가 있어 명목상으로는 비록 안다고 할지라도 기실은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 오직 바람나는 자귀[斤]를 사용해서 콧잔등에 묻은 흙을 찍어내더라도 정신이 암암리에 계합(契合)하는 사람은 다만 엄 상서(嚴尙書) 뿐이었습니다.
엄공(嚴公)이 살아계실 때에 엄공의 벗으로 이기(李杞)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또한 기인(奇人)이어서 그림을 더욱 잘 그려 일찍이 엄공의 초상화를 그렸더니, 아주 실상과 똑같아 엄공이 세 번씩이나 저에게 갖다 보여주셨습니다. 그 의도는 저에게 표지(標誌)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으나 제가 사양하고 감히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지난번에 우연히 시어(侍御) 댁에 나아갔다가 지난날의 유상(遺像)을 바라보고 바야흐로 절하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모습은 완연히 생시(生時)와 같아서 조용히 거처하실 때의 화창하셨던 얼굴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바야흐로 나아가 각하를 배알(拜謁)할 때나, 계단을 미처 오르지도 않아서 그 광채(光彩)를 바라볼 때에나, 나아가서 초상화를 대함에 안색이 충실하고 눈과 눈썹이 거침이 없어서 마치 말하고 웃을 것 같았습니다. 위아래를 훑어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빌려주신 은혜를 입어 받들고 집으로 돌아와 대청의 벽에다 걸어 놓고 며칠간 조석으로 공경히 절하기를 마치 부처와 보살상 앞에 절하듯이 하였습니다. 옛날을 곰곰이 생각하고 목메여 울면서 스스로 그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또 글이란 감정에 따라서 발로(發露)되는 것이므로, 마음속에 격(激)함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가히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감정에 나타나는 바에 인연해서 열매와 꽃다운 것을 주워모아 애오라지 찬사(贊詞)를 지은 것인데, 처음에는 엄공의 사업을 탐내어 글을 지은 것이 매우 빈번했으나, 글을 씀에 이르러서는 초상화의 위 공백이 매우 협착한 까닭에 글자를 헤아려 보아야만 쓸 수 있을 것이어서, 곧 깎아내고 또 깎아내서 그 생략하여 남은 것이 이와 같습니다.
아, 엄 상서께서는 천하의 영위(英偉)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웅장한 재주와 큰 도량이 너그러워 활달(豁達)하고 문무지략(文武智略)과 영특한 상기(爽氣)는 기이하고 위대해서 비록 남산(南山)의 대나무를 모조리 사용하더라도 다 쓸[書]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한폭의 조그마한 바탕에 어찌 문사(文辭)를 달려 두루 자세하게 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마도 백세(百世) 후에는 세월이 한없이 늘어져 단청(丹靑)이 퇴색되면, 비록 그 먼 후손(後孫)일지라도 그것이 누구의 화상(畵像)인지 알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내가 이를 찬양해서 대략 표적(標的)을 남겨 두는 까닭은 무릇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글은 비록 각하의 뜻에 만족하지 못할지라도 대개 연고가 있어서 지은 것으로서 본래 썩지 않음을 기하기 위한 것이니, 그 기대하는 뜻이 얕은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때로 혹시 그것을 관람하셔서 망극(罔極)하신 생각을 위로하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드릴 말씀 다 못 드리고 아무개[某]는 재배(再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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