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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02---충렬공 1사위 조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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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0 09:46 조회2,0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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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성---김효인---김방경---1女+조변
조영인---조충---1조숙창, 2조계순---조변---조문간, 조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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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趙변) ***충렬공의 1사위
?∼1288(충렬왕 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문하시중 충(  )의 손자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장인인 ★김방경(金方慶)의 세력에 힘입어 원종 때 낭장 겸 감찰사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행수(行首)로서 입직(入直)할 때 밤이 늦어 대궐문이 닫혀 못 들어가자 원종이 문틈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이는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하여 그 곧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궐직문제(闕直問題)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1년(원종 12) ★김방경이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할 때 장군으로 기용되고, 1274년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대장군으로 천호(千戶)가 되어 ★김방경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281년(충렬왕 7)제2차일본정벌 때 원제(元帝)로부터 소신교위관군총파(昭信校尉管軍摠把)에 임명되고, 1284년 대장군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우부승지를 거쳐 1287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그뒤 병으로 면직이 되자 왕은 그의 사위 유서(庾瑞)를 낭장으로 임명하여 위로하기도 하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전고(典故)에 정통하였으며, 성품이 관후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조계순(趙季珣) ***충렬공 장녀의 시부 즉 사돈 ※최항의 처부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횡천(橫川:橫城). 시중(侍中) 영인(永仁)의 손자로, 충(#충01)의 아들이다. 숙창(叔昌)은 형이며, 변(#변04)은 아들이다.
1250년(고종 37) 좌승선(左承宣)에 있었는데 당시 무인집정자인 최항(崔沆)에게 딸을 출가시켰다.
이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오른 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정(光正)이다.



■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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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위에 진(陣)을 친지라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서()인 ★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다가 다시 와서 싸우거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趙)과 더불어 1,000여 급(級)을 격살(擊殺)하고 배를 삼랑포(三郞浦)에 버리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매 죽인 바가 대단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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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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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으로 하여금 차신(車信-제국 공주에게 총애를 받은 자)의 딸과 결혼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가 총애를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조문간은 충렬공의 큰사위 조변의 아들임 (조영인-조충-조계순-조변-조문간,조문근)


■《고려사》 제103권 - 열전 제16 >
조충
〔조변의 기사 첨부〕
조충의 자는 담약(湛若)이니 시중(侍中) 조영인(永仁)의 아들이었다. 생후 한 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점차 자라면서 어머니를 지극히 사모하고 슬퍼하였으므로 집안 사람이 그를 효동(孝童)이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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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조숙창(趙叔昌)과 ★조계순(趙季恂) 인데 조숙창은 따로 전기가 있다. 조계순은 벼슬이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광정(光定)이라 하였다.

조계순의 아들은 ★조변이니 그는 조상의 문음과 장인 ★김방경(金方慶)의 관계로 단번에 낭장(郎將)으로 뛰어올라 감찰사(監察史)를 겸임하고 있었다.
한 번은 행수(行首)로 궁중에 숙직하게 되어 날이 저물어서 들어가니 문이 이미 닫혔다. 원종(元宗)이 이 소식을 듣고 문틈으로 들어오게 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조변이 사양하기를 “신하된 자는 문틈으로 드나들 수 없다”하고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유사(有司)들이 수직에 결근하였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파직당하였으나 사람들은 그가 정직한 것을 칭찬하였다.
★김방경이 진도(珍島)를 토벌할 때에 왕에게 고하고 조변을 다시 불러 장군으로 삼았다. 또 ★김방경을 따라 일본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웠으며 후에 원나라가 재차 일본을 원정할 때에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소신 교위(昭信校尉), 관군총파 벼슬을 주었으며 은패(銀牌)와 은인(銀印)을 주었다. 그리고 ★김방경을 따라 원정의 길을 떠났다.
벼슬이 우부승지(右副承旨),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병으로 사면하니 왕이 그의 사위 유서(庾瑞)를 낭장(郎將)으로 등용하여 그를 위로하여 주었다. 그는 그 후 미구에 죽었다. ★조변은 용모가 장대하고 고왔으며 옛문헌과 제도에 대하여도 자못 통하였고 성품이 너그러워서 아무에게도 원한을 끼친 일이 없었다. 아들은 조문간(文簡) 조문근(文瑾)이다.
★조문간의 자는 경지(敬之)이니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그도 역시 풍채가 아름답고 예절에 익숙하여 당시의 칭찬을 받았다.
조문근은 벼슬이 참지 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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