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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충렬공 金方慶 104---충렬공 2남 김흔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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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1 09:22 조회1,5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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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1273년 제주도 삼별초 진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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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다.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아들 ★김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憾),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1274년 1차 일본정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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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박지량(朴之亮)·★김흔(金)·지병마사(知兵馬事) 임개(任愷)로 부사(副使)를 삼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신(金侁)으로 좌군사(左軍使)를 삼고 위득유(韋得儒)·지병마사(知兵馬事) 손세정(孫世貞)으로 부사(副使)를 삼고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로 우군사(右軍使)를 삼고 나유(羅裕)·박보(朴保)·지병마사(知兵馬事) 반부(潘阜)로 부사(副使)를 삼아 3익군(翼軍)이라 이름하니 ★김흔(金)은 곧 ★김수(金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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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위에 진(陣)을 친지라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서()인 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다가 다시 와서 싸우거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趙)과 더불어 1,000여 급(級)을 격살(擊殺)하고 배를 삼랑포(三郞浦)에 버리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매 죽인 바가 대단히 많았다.

왜병(倭兵)이 갑자기 이르러 중군(中軍)을 쳐서 검(劒)이 좌우로 부딛쳤으나 김방경은 의연하여 조금도 물러가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빼어 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외치니 왜(倭)가 놀라 피하여 달아나므로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조변(趙)·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新奕) 등이 힘껏 싸워 왜병(倭兵)이 크게 패하여 엎어진 시체가 삼대와 같았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1278년)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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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드디어 갑옷을 감추어 두었다는 죄를 논하여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白翎島)에 귀양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귀양 가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가는 길을 막고 울면서 그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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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오늘 또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고 말들 하였다.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충렬왕 무인 4년(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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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김방경과 그 아들 ★김흔을 문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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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병진일에 왕이 흔도, 홍다구를 흥국사에 모이게 하고 김방경을 문초하였으나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므로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에 귀양 보내었다.
경신일에 왕이 궁궐 내에서 친히 기도를 드렸다.
계해일에 장군 인후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김방경을 귀양 보낸 것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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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 충렬왕 2 >
충렬왕 기묘 5년(1279)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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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일에 대방공 왕증이 독로화를 데리고 원나라로 출발하였는데 김방경의 아들 김흔, 원부의 아들 원정, 박항의 아들 박원굉, 허공의 아들 허평, 홍자번의 아들 홍순(洪順), 한강의 아들 한사기, 설공검의 아들 설지충, 이존비의 아들 이우(李瑀), 김주정의 아들 김심(金深) 등 양반 자제 25명을 보냈는바 모두 현직에서 3등급씩 올려 임명하여 보냈다.

***원부-원정 : 원정(=원관)은 김승용의 처부,
***허공-허평 : 허공은 김순의 처부
***한강-한사기-한악-한공의 : 한공의는 (김순-김영후-김천-)김사겸의 처부


■ 도서관학논집 제21집 (1994.12, 한국도서관 정보학회)

●몽산 덕이와 고려 인물들과의 교류 -필사본 <諸經撮要>의 수록내용을 중심으로- (남권희/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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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山은 丁丑(1277)년 여름부터 澱山의 일을 마치고 中吳의 休休庵이라는 작은 庵子에 머물러 쉬고 있었다. 그가 63세 되던 고려 충렬왕21년(1295) 겨울에 고려에서 了庵元明 長老와 覺圓上人, 覺性上人, 妙孚上人 등 8사람이 찾아가 같이 지내다가 충렬왕22년(1296) 여름에 仲孚上人 등 4사람은 돌아 갔다.

그해 겨울 萬壽上人이 몽산에게 가서 전하기를 고려국 내원당대선사 混丘, 정녕원공주왕씨 妙智, 명순원공주왕씨 妙惠, 전 도원수 상락공 金方慶, 시중 韓공康, 재상 廉공承益, 재상 金공昕, 재상 李공混, 상무 朴공卿, 상무 柳공(옷의변居) 등 여러 사람이 재삼 만나고자 하는 뜻을 전하여 오므로 休休長老가 멀리 上庵에서 安居하고 있을 때라 나누어 施를 베풀었다. 몽산은 답을 하지 않고 만수상인을 청하여 요암장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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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재상 金昕(炘) (1251-1309)
김방경의 아들이며 1279년 독로화로서 元에 갔으며 후에 첨의평리가 되었다. 1290년 합단의 침입을 물리친 공로로 판밀직사사를 거쳐 지도첨의사사에 올랐다. 元에서 7년간 있다가 韓希愈(?-1306)가 죽자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 삼중대광이 되고 상락공에 襲封된 뒤에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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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門景致>와 관련이 있어서 이때는 충렬왕22년(1296) 9월부터 동왕23년(1297) 5월까지의 8개월간 공주와 從臣 243인 총 590인을 데리고 세자의 결혼참석과 하정을 목적으로 하여 실제로는 元의 강압을 완화시키고 고종46년(1259) 이후의 포로를 송환받았다. 回賜品으로는 여러 것이 있었으나 왕과 공주는 金?衣를 받았다.

즉 1296년 겨울에 몽산에게 몽산화상이 와서 고려의 열 사람이 뵙기를 청하였으니 바로 충렬왕의 入元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또 몽산이 十松頌과 序와 後序를 쓴 시기가 1297년 2월이니 역시 충렬왕과 공주 두 사람이 돌아가기 전과 일치하므로 이때 몽산의 글을 받아 왔으며 이때 了庵元明이 跋을 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당시 金方慶이나 염승익 등이 元에 간 것은 다른 史料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이들은 현실정치를 떠난 상태로 있었으나 김방경의 아들인 金昕은 당시 이미 세력가가 되어 있었으므로 父子가 같이 몽산을 만나는 행적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이들의 행적에서 공주, 대신, 명사 등이 몽산을 모두 만나라 간 배경에는 이미 고려에서 몽산의 임제선이 지속적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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