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속의 도산 안창호(1878-1938)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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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22 03:53 조회1,620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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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방기창(邦基昌)135) 목사 집에서 유숙할 즈음, 당시 숭실 중학생으로 교육과 애국의 열성으로 학계와 종교계, 일반 사회에 명성이 쟁쟁하였던, 동지 최광옥(崔光玉) 군과 친밀히 교제하며 장래 일을 의논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최군이 나의 결혼 여부를 묻기에, 나는 과거 여러 차례의 실패를 대략 말해 주었다. 최군은 안신호(安信浩) 양과 약혼할 것을 권고하였다. 신호는 안창호(安昌浩)136) 의 누이동생으로 그때 나이 20여 세였는데, 사람됨이 매우 활발하고 처녀 중에 명성(明星)이라고 한다.
직접 대면하여 보고 피차에 뜻이 맞으면 혼인하기로 하였다. 안도산의 장인인 이석관(李錫寬)의 집으로 신호를 오라 청하고서, 최광옥 이석관과 함께 만났다. 신호를 면대하여 몇 마디 의사교환을 한 후 숙소로 돌아왔더니, 최군이 뒤따라와서 의향을 물었다. 나는 내 뜻에 맞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최군 또한 신호의 합의를 전하고, 이튿날 아주 약혼까지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어찌 뜻하였으랴, 다음날 아침 일찍 이석관과 최군이 달려와서, 신호가 어제 저녁에 편지 한 통을 받고 밤새껏 마음속에 큰 고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다른 일이 아니라, 안도산이 미국에 건너갈 때 상해를 거쳐갔는데, 그때 상해 모 중학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梁柱三)137) 군에게 자기 여동생과 혼인하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양군이 아직 재학중이라 혼사에 대해 정해진 견해가 없으니 학업을 마친 후 결정하겠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어제 나를 만나고 돌아가니, 마침 양군에게서 자기는 학업을 마쳤으니 결혼 여부를 통보해 달라는 편지가 왔다는 것이다. 양손에 떡이라, 신호가 어찌할 줄 모르고 애를 쓰는 중이니, 다시 확정된 의사를 듣고서 떠나라는 것이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최광옥은 다시 와서 신호의 결심한 바를 말했다. 신호 자신의 처지로서는 도의상 양주삼이나 김구 중에 누구를 고르고 누구를 버릴 수 없으니 양쪽을 다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청혼을 받고도 몸이 약한 것을 꺼려 승낙하지 않았던,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김성택(金聖澤)을 택하고, 김 양 두 사람은 거절하기로 결심하였다 한다. 어쩔 수 없지만 일의 모양새나 정리상으로는 매우 섭섭하였다.
시간이 지나 신호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지금부터 당신을 오라버님으로 섬기겠습니다. 매우 미안합니다. 내 사정이 그리된 것이오니 너무 섭섭히 생각 마십시오." 나는 신호의 쾌활하게 결단하는 도량을 보고서 더욱 흠모하게 되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138)
나는 장련에 돌아와 교육과 종교에 종사했다. -----
135) 방기창(1851-1911),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기독교 장로회의 최초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 1883년 동학 접주에서 1893년 기독교 목사로 변신하여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지역에 많은 전도를 하였고, 1898년부터 평양 널다리골(章臺峴)교회 제1대 장로가 되엇다.
136) 안창호(1878-1938), 평남 강서 출신,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교육자 독립운동가
137) 양주삼(1879-?), 미국 밴더빌 대학 신학과를 졸업. 일제하에서 목사, 감리교 감독,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재직하다 한국전쟁 때 납북당됐다.
138) 안신호는 해방 후 진남포 기독교 여맹위원장을 하였는데,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백범을 만나 평양의 여러 곳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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