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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09---충렬공 3남 김순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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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3 10:07 조회1,3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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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金恂)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넷째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에 과거에 급제하여 낭장(郎將)으로 학사(學士)·직강(直講)이 되었다. 아버지 방경이 일본을 정벌할 때 종군하고자 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와서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승지, 이듬해 좌승지에 오르고 광정부사(光政副使)·승지(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를 역임했으며, 다시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사직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등용되어 1312년(충선왕 4)에 중대광(重大匡)·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1316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퉁소를 즐겼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순 열전
김순(恂)의 자(字)는 귀후(歸厚)인데 충렬왕 5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낭장으로 있다가 곧바로 학사 직강(學士直講)으로 올라갔다. 김방경이 일본 정벌로 떠나자 김순은 종군하려고 하였는데 김방경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가만히 배에 올라 종군하고야 말았다. 귀환하게 되자 전중 시사(殿中侍史)로 승직하고 여러 번 조동되어 밀직부사로 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직하였다. 충선왕이 그를 등용하여 중대광 상락군(上洛君)으로 삼았고 충숙왕 8년에 판삼사사로 임명되었다가 이 해에 나이 64세로 죽었고 문영(文英)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성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예서(隸書)에 능하였고 성기(聲伎-노래 잘하는 기생)를 집에 데려다 두고 날마다 악기를 듣는 것으로써 낙을 삼았다. 그의 아들로는 김영돈(金永旽), 김영휘(金永暉), 김영후(金永煦)가 있다.


■ 동안거사집 단모부 (1295, 이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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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 영공(令公 =?)은 월편(越篇)을 계승했고,
★막내아들(=김순)은 학사가 되어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도다.



■ 충렬공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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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김민성)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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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왕에게 요청하여 고향 땅에 성묘하러 가게 되었는데 왕은 그의 아들 ★김순(恂)을 태백산 제고사(祭古使)로 임명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친구들의 만류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들더러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 들일 때가 되였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 문영공 묘지명 (1321년 민지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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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께서 글씨를 잘 쓰심으로 비문을 많이 쓰시고 소년시절부터 학문에 힘쓰시고 선대(先代)의 음덕(蔭德)으로 벼슬에 들어가 장생서승(掌牲署丞)이 되시고 후에 별장(別將)이 되어 견룡행수직(牽龍行首職)을 맡아서 비록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여도 그 뜻은 항상 문학에 두었으니 대개 부친께서 왕조 양대(王朝 兩代)의 최고(最高) 벼슬인 장상(將相)을 지냈으나 오직 과거(科擧)를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으므로 아드님이 능히 조부의 업적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공이 그러므로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지원(至元) 十六年 춘계과장(春季科場)에서 금방 부장원(金榜 副壯元)으로 급제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섭랑장(攝郞將)에 임명되더니 후에 다시 국학직강(國學直講)이 되시니 이는 공이 능히 부친의 유한(遺限)을 펴신 것이다. 이로부터 부친께서는 막내 아들을 더욱 사랑하여 항상 신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하정사(賀正使)로 가실 때도 꼭 데리고 다니셨으나 다만 일본을 정벌하러 가실 때는 따라오지 못하게 하신 것은 종군하여 위태한 일에 참여치 못하게 함이었다.

공이 이에 출정행차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먼저 군함에 올라타고 갔는데 마침내 부친을 호위하고 구원(救援)한 공(功)이 자못 컸으니 이는 공이 오로지 충효로서 발분(發憤)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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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년(壬戌年)에 남방사신(南方使臣)의 명을 받고 선친을 배행(陪行)하여 고향 조부 묘소에 다녀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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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元貞) 을미년(乙未年) 겨울에 과거(科擧)로 선발된 동지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名士)들이라 크게 화려한 연석(宴席)을 베풀으니 □□□□사(士) 조야(朝野)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선친에 대한 극진한 영광(榮光)이요 효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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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己亥年)에 공께서 그칠 줄을 아시고 벼슬을 사퇴하셨다. 그 이듬해 8월에 선친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유원(遺願)에 의하여 고향 선영(先塋)에 장례를 모셨다. 경술년(庚戌年) 겨울에 선친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임자년(壬子年)에 다시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을 봉하여 선친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을 이어 받았다.

기미년(己未年)에 또 선친 묘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계자 영후(季子 永煦)를 시켜 모시고 배향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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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의 유한(遺寒)은 과거(科擧)에 급제하지 못함이더니 공이 그 뜻을 이어 문학에 뜻을 예민(銳敏)하게 세우고 대대로 전해오는 조상의 법도를 본받아 시시(時時)로 금낭(錦囊 : 시 작품을 넣은 비단주머니)이 찰만큼 시 짓기에 노력하더니 묘령(妙齡) 22세에 금방(金榜)에 급제하여 이름이 사방에 떨치니 대각에서 전파하는 고시문은 향기가 돌았도다. 한번 학문의 권세를 잡으니 형제가 열(列)을 이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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