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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21---충렬공 묘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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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5 09:03 조회1,5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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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김씨 제학공파보 (1990)

<전략> 墓所 舊譜云 安東府禮安縣 時 禮安爲安東屬縣. 而失傳二百年 萬曆甲午 始尋瑩域. 麗王所爲神道碑 姓孫禮生 所竪碣 破折. 壬寅 改封立碑. 天啓丙寅 十二世孫時讓 按節本道 以失墓時 故翰林金垓之塚 逼近犯葬 啓請掘移 且以 床石狹小 改備. 姓孫 尙璘 議置墓田定以十月上旬 每歲享祠

묘소는 옛족보에 이르기를, "안동부 예안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예안은 안동에 속한 현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실전되어 오다가 만력 갑오(1594년)에 비로소 묘소를 찾았다.

고려왕(충렬왕)이 세운 바 있는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졌다. 임인년(1602년)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천계 병인(1626년)에 12세손인 ★시양(時讓)이 본도(경상도) 안절사(관찰사)로 와서 묘가 실전해 있을 때에 한림 ★김해(金垓-광산인)의 묘가 아주 가까이 범장(몰래 장사지냄)해 있었으므로 묘를 파내어 옮기도록 요청하였고, 또한 상석이 협소하여 다시 설비하였다.

후손 ★상린(尙璘)은 의논하여 묘전(墓田)을 설치하였고 10월 상순에 매년 향사하기로 정하였다.

***荷潭公 金時讓 (1581-1643) :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1626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묘역을 정비하고 상석을 새로 함
***養眞公 金尙璘 (1616-1675) : 통훈대부 사복시정이며 처음으로 위토를 준비하였음



■ 김준식 안동시 문화원장 증언 (2002. 8)

선김과 광김은 수백 년간 동산수호(同山守護)를 해 온 관계를 맺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김효로(金孝盧, 1455-1534) 공의 장례시 충렬공의 묘소 지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김효로 공의 생몰 연대를 고려할 때 김효로 공의 증손자인 ★김해(金垓, 1555∼1593) 공의 장례시 충렬공의 묘소 지석이 발견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한다. 김해 공은 임란 다음 해에 돌아가셨는데, 충렬공 묘소 위쪽에 김효로 공의 묘소가 있고, 충렬공 묘소 밑에 땅을 판 흔적이 있다. 이로 보아 김해 공의 장례시에 지석이 출토된 것으로 추정한다.



▣ 김해(金垓) 묘지명(墓誌銘)
이현일(李玄逸) 지음

근시재 선생(近始齋先生) 김공(金公 : 김해)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93년이 되었다. 어느 날 선생의 손자 성균관 진사[國子上庠] 김면(金?)이 가문에 전래한 문적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의 선덕(先德)과 의행(誼行)으로 볼 때 묘지(墓誌)가 있어야 할 터인데, 처음에 국난(國難)이 안정되지 않아 장례를 치를 때 미처 만들지 못하고 그럭저럭 미루어 오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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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朝鮮朝)에는 지음성현사(知陰城縣事)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김회(金淮)란 분이 비로소 안동(安東)에서 살았고 그의 아들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김효로(金孝盧)가 또다시 예안(禮安)으로 옮기었다. 이조참판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김연(金緣)을 낳고, 관찰사가 성균관 생원 김부의(金富儀)를 낳았다. 김부의가 퇴도(退陶) 노선생(老先生 : 이황)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었고 권씨(勸氏 : 권습 勸習)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 2월 모일(某日)에 선생을 낳았는데, 휘(諱)는 해(垓)이고 자(字)는 달원(達遠)이다. 선생이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큰어머니 하씨(河氏)에게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헌칠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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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정월에 명(明)나라 군사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자 왜적이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므로, 선생이 형세를 틈타 공격하여 적병의 머리를 상당히 많이 베고 이어 적병을 쫓아 남하하여 여러 군대와 밀양(密陽)에서 회합(會合)하였다. 5월에 단인(端人) 이씨(李氏)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계모(繼母)는 늙고 아들은 어린 데다가 형제마저 없는 것을 생각한 나머지 잠시 돌아가 가사(家事)를 처리한 다음, 곧바로 군영(軍營)으로 달려와 경주(慶州)에 이르러 병환이 나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온 군중(軍中)이 친척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고 원근의 알고 모른 사람들이 너나없이 애석해 하면서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갔다.”고 하였다.
이 해 11월 경오일(庚午日)에 고을 서쪽 지례촌(知禮村) 계향(癸向)의 자리에 장례를 치렀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묘소와 같은 묘원이다. 이는 선생이 상락공의 외손이기 때문이었다.
을미년 가을에 임금이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에 순절한 선생의 의리’를 생각하여 특별히 승의랑(承衣郞)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상락공의 후손으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부임한 자(▶김시양)가 있어 강제로 선생의 묘소를 옮기라고 하여 그 이듬해 2월에 임시 재실(齋室)의 뒤쪽 산기슭에다 안치해 놓았다. 그때 마침 나라 안에 전쟁이 나 묘지를 택하여 안장하지 못하였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거음곡(居音谷) 신좌 을향(申坐乙向)의 자리로 이장(移葬)하였는데, 때는 12월 아무날이었고, 그 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풍수가(風水家)의 말에 따라 또 송음동(松音洞) 유좌(酉坐)의 자리로 이장하였는데, 그 날짜는 4월 24일이라고 한다.




■ 안동김씨 대종회 연혁

---1990
7月23日 忠烈公 묘소가 四百餘年間 ★光山金氏 종산에 모셔져 있어 ★泰亨 會長께서 ★崙會氏와 같이 安東에 내려가 都評議公派 ★冕鎬씨를 만나 光山金氏 종회장을 尋訪하여 祿田面 九松洞 산19番地 忠烈公墓域 二百九十九坪을 讓渡키로 합의하여 우리 산으로 확보하였다.

또한 우리는 光山金氏 문중에 고맙다는 뜻으로 金一千萬원을 희사하였다. 7月 23日 묘역 확장 축대 및 계단 축조 공사를 二千七百五十萬원을 들여 동시에 착공하여 단기간내 훌륭히 완공하니 數 百餘年의 통한을 풀게 되었다. 이에 ★泰亨會長의 공로가 지대하였다



■ 대종회보 제73호 (2001. 7)
충렬공묘소 題下 임야 영정각부지등기필

영정각 부지와 충렬공묘소 제하 림을 ★광산김씨와 합의 양수키로 한후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330번지 대와 동리 19번지 림에 대하여 분할측량을 5월 4일 필하고 등기수속을 밟어 7월 5일 안동김씨대종회 명의로 등기를 완료하였다.

⊙등기된 내용
①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30-1 대 458㎡(약 150평)
②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19-1 임야 2,833㎡(약 936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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