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24---충렬공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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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6 08:33 조회1,446회 댓글0건본문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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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王)이 또한 후회(後悔)하고 충렬왕(忠烈王) 33년 정미(丁未=1307)년 6월 14일에 왕(王)이 영지(令旨)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故 上洛公 金方慶)은 공(功)이 많은지라 대려(帶礪=黃河의 띠(帶)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낮아지도록 오래라는 뜻)와 같이 잊어버리기 어렵다."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追贈)하고 충렬(忠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왕명(王命)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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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때에 그를 선충 협모 정난 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 디지털한국학 홈
김흔(金흔)
---한희유가 죽자(1306), 7년 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삼중대광(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三重大匡)이 되었다.
■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흔 열전
---당시에 한희유가 재상으로 있었으므로 김흔은 고려로 돌아오려 하지 않고 연경에서 대략 7년간이나 머물러 있었다. 한희유가 죽고 난 뒤에 김흔을 찬성사 자의(咨議) 도첨의사사로 임명되고 삼중 대광(三重大匡)의 작위를 더하여 받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하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만호의 관직은 사양하여 형의 아들 김승용(承用)에게 주었다.
■ 디지털한국학 홈
김순(金恂)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1308년)용되어
■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순 열전
---충선왕(1308-)이 그를 등용하여 중대광 상락군(上洛君)으로 삼았고
■ 碧梧遺稿(벽오유고)
奎 15711
★李時發(1569~1626)의 遺稿이다.
-----생략-----
高麗宣忠協謀靖難定國륵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충렬공묘지문(이시발 지음)번역> ---유림학당 국회씨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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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예안현 관내 서릉동에 있고, 신도는 고려 왕명으로 비를 세움이 있었다(고 하나) 세대가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 후손인 ★예생(禮生)이 일찍이 이 현(예안현)을 살펴보고, 비석을 세우고 표식을 하였는데, 이제는 이 비석과 더불어 깨져 버렸다. 아! 뒷사람이 어떻게 (충렬)공의 묘임을 알 수 있겠는가?
■ 안동김씨 제학공파보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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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충렬왕)이 세운 바 있는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졌다. 임인년(1602년)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 {우리나라 석비 양식의 연구} (이민식)
---전 략---
그리고 이 시기의 입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墓碑類의 등장이다. 고려시대는 墓壙이나 그 주변에 묻은 墓誌가 많이 애용되고 墳墓의 외곽에 세우는 묘비류의 입석은 전무하다시피 하였는데,
고려말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부터는 묘비류의 입석이 시작되었다. 유교 윤리에 따라 喪葬禮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은 부모나 스승의 훌륭한 덕을 현양하는 것이 효의 한 방법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묘비류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규모가 가장 큰 神道碑가 문헌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것은 ★金方慶神道碑이다. <고려사> 열전 김방경조에 충선왕의 명으로 신도비를 입석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실물이 전하지 않아 실재로 입석하였는지는 의문이다. 또 ★李時發(1569-1626)이 찬한 ★金方慶墓誌에 "세월이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입석되었더라도 이시발의 생존 전에 이미 훼손된 듯하다.
기록이 확실하다면 김방경이 돌아간 해인 충렬왕26년 (1300)이나 충렬왕27년 (1301)에 건립되었을 것이고 왕명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장식도 화려했으리라 짐작된다.
아무튼 문헌으로 전하는 최초의 신도비임에 틀림이 없고, 입비가 최소한 충선왕대부터는 행해졌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다.
이 시기는 安珦(1243-1306)이 성리학을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도입하던 때라 신도비의 입석이 성리학과 깊은 연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후 략---
■ 안동김씨 족보
충렬왕33년 정미 (1307) 6월 14일에 왕이 영지를 내려 이르되 ---중략--- 시호를 충렬이라 하여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그 당시의 신도비는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 침략군에 의해 파괴되어 없어지고 그후 379년동안 재건치 못하고 내려오다가 서기 1971.11.26일에 안동군 녹전면 구송동 산117-3에 여러 特志 종인들의 성력에 의하여 재건하였다.
소재지 : 경북 안동 녹전면 구송동 산117-2 (와룡-녹전 중간지점 대로변)
건립년월일 : 서기 1971. 10.30
비문 지은 사람 : 학술원장 문학박사 ★이병도
비문 쓴 사람 : 충렬공 22대손 (안렴사공 18대손) 의학박사 ★김사달
연혁
서기 1312년 (고려충렬왕4년) 6.26일 왕명에 의하여 신도비를 건립하였는데
서기 1592년 (조선선조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병 侵寇(침구)로 인하여 불행히도 毁失(훼실)된후 380년만에 대종회에서 건립하였음
■ 대종회 연혁
---1970
12월 28일에는 安東市 映轉面 九松洞 山117-2番地 111坪을 忠烈公 神道碑 敷地로 五萬원에 매입하였다.
---1971
4월 15일 神道碑 건립 장소 삼거리 대로에서 忠烈公 묘소까지 약 3Km의 세로를 공사비 壹拾萬四仟六百원을 들여 자동차가 진입할수 있도록 확장하였는데 翼元公 二十一代孫 ★泰奉氏가 총감독을 해 주었으며, 在日 宗親인 翼元公 十七代孫 ★又榮氏께서 神道碑 건립 기금으로 六拾萬원을 희사하여 이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였다.
5월초에 神道碑를 건립키로 계획을 수립하여 적극 추진한 바 11월 26일에 완공하고 忠烈公 享祀와 아울러 二百餘 종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神道碑 건립에 소요된 전액은 七拾七萬九仟四拾원이다. 당일 제막식 경비도 九萬五仟원이 소요되었다.
---1989
12月 7日 忠烈公 神道碑閣을 건축비 二千三百四十九萬一千三百六十원을 들여 건축하므로 할아버님 神道碑가 풍우한설에도 마모되지 않고 영원 보존케 되었다.
---1991
忠烈公 神道碑閣 마당에 忠烈公 略史臥碑를 三百四十六萬三千원을 들여 건립하였고,
○ 1998년 12월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한국서예사특별전18 (한국의 명비 고탁) 논문집에 이민식 (한신대학교박물관 연구원)이 쓴 <우리나라 석비의 양식연구> 라는 논문에 보면
현재 문헌상으로 기록된 최초의 가장 규모가 큰 신도비로 우리 가문의 중시조이신 충렬공 金方慶신도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李時發(1569-1626)이 찬한 金方慶墓誌(=1602년에 이시발 찬 김방경 묘갈)에
"세월이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입석되었더라도 이시발의 생존 전에 이미 훼손된 듯하다.
○ 족보에 기록된
---1307년에 세워진 김방경신도비는 1592년 임진왜란때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라는 내용은 더 많은 고증과 검토가 필요하다.
○ 현재의 신도비는 1971년에 안동시 녹전면 구송동에 이병도 박사가 撰하고 (안렴사공파) 서봉 김사달 박사께서 書하여 안동김씨 대종회에서 다시 세운 것입니다.
☞ 검토사항
1)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면 매우 크고 화려했을 것이고, 撰者와 書者의 기록 등이 개인 문집에라도 실려있을 텐데, 현재 전혀 알 수 없습니다.
2) 충렬공행장(1350년 안진 跋)에는 충렬왕 33년(1307)에 충렬왕이 왕명으로 충렬공 신도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 김방경열전에는 충선왕의 명령으로 충렬공 신도비를 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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