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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25---충렬공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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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6 08:50 조회1,52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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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충렬공 묘비 (1495-1498 예안현감시)

■ 碧梧遺稿(벽오유고) *李時發(1569~1626)의 遺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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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예안현 관내 서릉동에 있고, 신도는 고려 왕명으로 비를 세움이 있었다(고 하나) 세대가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 후손인 ★예생(禮生)이 일찍이 이 현(예안현)을 살펴보고, 비석을 세우고 표식을 하였는데, 이제는 이 비석과 더불어 깨져 버렸다. 아! 뒷사람이 어떻게 (충렬)공의 묘임을 알 수 있겠는가?


■ 안동김씨 제학공파보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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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충렬왕)이 세운 바 있는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졌다.
임인년(1602년)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 김예생(金禮生)
<예안현감>
통선랑(通善郞) 김예생(金禮生) - 연산군 원년 을묘년(1495년) 8월 부임 무오년(1498년) 6월 체직됨.
- <국역 선성지> 73쪽

◇ 김 예생(金禮生): 연산군 원년 을묘년(1495년) 8월 부임. 무오년(1498년) 6월 체직됨. 청렴하였으며 백성의 송사를 다스림에 오직 명쾌하였다. 일을 처리함에는 그 마땅함을 얻었다. 동헌 남쪽 청사는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73쪽)
《출처 : 안동김씨 홈페이지, 작성자 : 김 윤식, 작성일 : 2004/01/01》

金 禮生(김예생) : 통선랑(通善郞), 1495년(연산군 1 을묘) 8월~1498년(연산군 4 무오) 6월 체직, 송사 처결이 오직 명확하고 동헌(東軒)과 남청(南廳)을 구축함.
     --<후략>--
《출전 : 예안향교지 pp327/예안향교/2002》

3. 청도공(淸道公) 예생(禮生)
  가. 김 예생 표갈(金禮生表碣)
  공(公)의 휘는 예생(禮生)이요. 안동인(安東人)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청도군수(淸道郡守)를 지냈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 증직되었다. 配자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인천이씨(仁川李氏)요, 감찰(監察) 만수(萬壽)의 따님이다. 2남1녀를 길렀는데 맏이 윤종(胤宗)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경상도 좌병사(慶尙道左兵使)이며, 다음 윤선(胤先)은 진사에 등제하였다. 딸은 유 근(柳近)에게 출가하였는데 郡守이며, 서자 윤복(胤福)은 진사에 등제하였다. 묘(墓)는 계류동(溪流洞) 계좌(癸坐)의 언덕에 있다. 상하분(上下墳)으로 되어 있으며 표갈(表碣)이 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청도군수(行淸道郡守) 김예생지묘(金禮生之墓)
정덕(正德)13년 무인(戊寅 : 명나라 무종13년, 1518년) 10월13일 세우다.
☞ 청도공(淸道公) 예생(禮生) 할아버지는 1518년(중종 13년)에 졸하셨음을 알 수 있읍니다.
  나. 숙인(淑人) 인천이씨지묘(仁川李氏之墓)
  음각(陰刻)에 이르기를, 고(考)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비(妣) 전의이씨(全義李氏), 부(夫) 청도군수(淸道郡守) 김공(金公)은 곧 상분(上墳)이다. 경태 병자(景泰丙子 : 세조2년, 1456년)에 태어나 정덕 신사(正德辛巳 : 중종16년, 1521년)에 졸(卒)하여 영평 계류동(永平 溪流洞)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선전관(宣傳官) 윤종(胤宗)과 윤선(胤先)이요, 딸은 전설사 별제(典設使 別提) 유 근(柳近)에게 출가하였다.
《출전 : 가보(家譜) 번역본/김재희/1996》




2. 1602년 이시발 찬, 조우인 서로 세운 묘비

묘 아래에서 거쳐하였던 참봉 ★김탁과 생원 ★김평, 그리고 후손 참봉 ★경달(慶達)과 가까이 사는 여러 후손들이 전에(1495-1498) 후손 예생이 세웠던 묘비의 깨져 버린 것을 다른 돌로 바꿔서 새롭게 하였는데, 이시발이 재물을 도왔고 金方慶 墓誌를 기록하여 1602년 당대의 명필 조우인 書로 세우고, 金方慶 墓誌는 이시발의 문집 <벽오유고>에 실려 있다.


■ 碧梧遺稿(벽오유고)
奎 15711
★李時發(1569~1626)의 遺稿이다.
-----생략-----
高麗宣忠協謀靖難定國륵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 충렬공묘지문(이시발 지음)번역
---유림학당 국회씨의 번역

高麗 宣忠協謀 靖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上洛 忠烈公 金方慶 墓誌
(고려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 충렬공 김방경 묘지)

安東之金, 系出新羅敬順王.
안동 김씨는, 가계가 신라 경순왕에게서 나왔다.

公爲十五世孫. 生麗代. 仕高元忠烈朝. 勳業茂著. 轟갈(1)古今. 載在國史及行狀. 斑斑可攷. *(1=車+葛)
공(충렬공 김방경)은 15세손이 되는데, 고려시대에 나서, 고려 충렬왕대에 벼슬하여, 공업이
무성하게 드러나 고금에 크게 떨쳤으니, 행적이 국사(고려사)와 행장에 있어, 또렷하게 살필 수 있다.

姑撮其表表者言之 則忠直信厚. 得於天性. 制行也勤儉寡默. 立朝也竭忠奉國. 至於行師有律. 戰克攻取. 珍島之役. 日本之征. 此其大較也.
잠시 그 뚜렷한 것만을 모아 말한다면, 곧 충직하고 신후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니, 행동을 절제함에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묵하였으며, 조정에서 복무할 때에는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었고, 군사일에 나아감에 이르러서는 법도가 있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얻었으니, 진도의 싸움과 일본의 정벌 등 이것이 그 대략이다.

厥後內外苗裔趾美석(2)赫. 三百年于玆. 豈非所謂德厚者流光歟. 墓在禮安縣治西陵洞. 神道有麗王命立碑. (*2=潟-삼수변=신 석, 까치작, )
그 뒤로 안팎으로 후손들이 종적이 아름답고 크게 빛나기를 지금까지 300년이니, 어찌 이른 바 덕이 깊은 사람이 끼친 후광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현 관내 서릉동에 있고, 신도는 고려 왕명으로 비를 세움이 있었다(고 하나)

世久無徵. 姓孫禮生曾監此縣. 竪碣爲標. 今幷與此碣而破折. 嗚呼. 後之人何以知公之墓乎.
세대가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 후손인 ★예생(禮生)이 일찍이 이 현(예안현)을 살펴보고, 비석을 세우고 표식을 하였는데, 이제는 이 비석과 더불어 깨져 버렸다. 아! 뒷사람이 어떻게 (충렬)공의 묘임을 알 수 있겠는가?

參奉金坼生員金坪. 以外裔居墓下. 與姓孫參奉慶達  在近諸孫. 謀易他石以新之. 且加封植. 來語余. 余於公. 爲母姓十三代孫. 嘗拜公之墓. 爲之助其資. 仍識其梗槪云.
참봉 ★김탁과 생원 ★김평등 여러 후예가 묘 아래에서 거쳐하였는데, 후손 참봉 ★경달(慶達)과 가까이 사는 여러 후손들과 함께 다른 돌로 바꿔서 새롭게 하기를 꾀하고, 장차 이를 북돋아 세우고자 하여, 찾아와 내게 말하였다. 나는 (충렬)공에 대하여, 어머니의 성(외가)으로 13대 후손이 되니, 일찍이 공의 묘소에 참배하였고, 비석을 세우는 데 재물을 도왔으니, 이 때문에 그 대강을 알게 되었다.

嘉善大夫 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大丘府 都護府使 巡察使 李某志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부 도호부사 순찰사 ★이모(李時發)가 기록한다.

풀어쓴이;김국회(익원공파, 유림학당)
옮긴이:김영환(문온공파)



■ 후예 참봉 김탁


■ 후예 생원 김평


■ 후손 참봉 경달(慶達)


■ 이시발(李時發)
1569(선조 2)∼1626(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아버지는 진사 대건(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도(燾)의 딸이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생략-----
저서로 《주변록 籌邊錄》·《벽오유교》가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이시발(1569-1626) ---김도의 외손자
○안렴사공(휘사렴)의 6대손인 병천 입향조 김공언의 둘째 아들인 김도의 외손자인
(이대건-)이시발은 경주이씨로 1602년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직시 출렬공(휘방경)의 묘갈을 건립하였고, 그의 유고집인 벽오유고에 충렬공 墓誌가 수록되어 있으며, 김도의 사위 이대건(李大建,) 이시발의 손자 이인혁(李寅爀)은 오창 송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김공언---2/4김도---따님(+이대건)---이시발


■ 조우인(曺友仁)
1561(명종 16)∼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이96齋). 경상도 예천출생. 우부승지 계형(繼衡)의 증손이다.
-----생략-----
저술로는 문집 《이재집》과 가사집 《이재영언》이 있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3. 1966년 김사옥 서로 의성 사촌, 안동 소산, 오은공 후손들이 세운 충렬공 묘비

충렬공 묘 앞에서 올려다 보면서 우측에는 비면이 마모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옛 묘비가 서 있고, 좌측에는 새로 세운 묘비가 서 있습니다.
우측의 옛 묘비는 글자가 마모되어 확인되지는 않지만 1602년 ★이시발 撰, ★조우인 書로 세운 충렬공 묘비인 듯하고 좌측의 묘비는 1966년 ★김사옥 書로 의성 사촌, 안동 소산, 오은공 후손들이 우측의 옛 묘갈문을 옮겨 적으면서 세운 것입니다.


■ 金思玉(김사옥)

괴산 증평 남하리 금반부락 내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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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思玉(김사옥)은 일생동안 많은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쳐주신 공으로 교은불망비가 서 있고 청안향교 전교와 유도회장을 역임하였다. 당대 명필이었다 하는데, 1955년 안렴사공 신도비운 서문을 짓고, 1966년 안동 충렬공 묘역에 세운 묘비를 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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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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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의 후예 金坼과 金坪은 광산김씨 후예를 이름이고(外裔居墓下) 후손 참봉 경건(慶建)은 익원공파 선조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