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27---충렬공 재실 飮水齋(음수재)
페이지 정보
일송정 작성일04-08-26 08:54 조회1,496회 댓글0건본문
1.능동 재실 창건
창건 연대 및 건축과정 : 미상
규모 : 3칸 초가
관리 : 안동의 익원공파 소산문중과 사촌의 도평의공파에서 관리.
창건 연대 및 과정 추정
(1)추정 1 : 1626년 *하담공(휘 時讓. 제학공 후손) 묘역 정비시(범장한 광산김씨 김해의 묘 이장. 상석 세우기. 봉분 사초. 제절 넓히기 등) 소규모의 재실 창건 가능성.
이 때는 위토가 없어 시제 때마다 사촌의 도평의공파와 안동의 익원공파 소산문중에서 제수비를 거출하여 시제를 모신 것으로 추정.
(2)추정 2 : 1600년대 후반. *양진당(휘 相璘. 도평의공 후손)께서 위토를 장만한 이후 창건했을 가능성
이 때부터 위토의 도지비로 시제를 모시기 시작함.
(2)<國譯 晩沙文集>(金振鍾 저. 2003. 4. 金檍 발행) 내의 <陵洞齋舍 重建 上梁文> 내용 참조 확인.
*晩沙公(휘 振鍾) : 1883-1951. 도평의공파 19세손.
중건과정 및 중건 시기 추정 관련 자료 : <國譯 晩沙文集>(金振鍾 저. 2003. 4. 金檍 발행)
P.338-339. 내용
<슬프도다 세상의 억겁 변화 속에 말 못할 여러 해가 지났고 선영의 보호는 청산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말이 없고 징표가 없으니 외로운 중이 향불을 올렸으며 무덤가에 白楊은 묵은 지 오래였으니 나무하는 첨지들의 도끼질이라 슬픔이 더하였네. 무슨 다행인가 萬曆의 赤馬(丙午. 주:1606년. 선조39. 갑오(1594년)의 誤記인 듯)년에 다시 靑烏(주:道를 배운 선비)의 두 번째 가림을 받았으며 감히 먼 耳孫(주:八代 이하의 자손)들의 정성을 이루어 深目(주: )자의 가르치는 징표를 기꺼이 만났구나. 하潭公(주:荷潭公의 誤記. 휘 時讓을 말함)이 監司로 왔던 날에 미쳐서야 상석을 다시하고 투장을 파냈으며 養眞堂公의 보본의 정성으로 位土를 장만하고 묘사를 받들었네. 옛날부터 조상을 위하는 지성의 도리가 없었음인가 어찌 오늘에 와서 거창한 齋宮의 역사가 있을까? 오랜 세월 비바람이 씻기어 그 무너질 걱정이 어이 없을소냐. 세상은 변천하고 형세는 줄었는데 하물며 또 다투는 부끄러움도 있었구나. 오랜 세월 경영이 항상 주저함이 있을 뿐 다만 세변한 것을 연고로 하며 경계의 분명치 못함이 거리낌이 되었네. 만약 管攝(관섭. 주:두 가지 일을 겸하여 조관함)하지 않고 버려서 行路에 거짓말을 시키면 또한 슬프지 않을까. 멀리 흩어져 사는 종친에게 널리 통고하여 이에 여러 대 겨를이 없어 이루지 못한 일 도모하였네.> (하략)
양진당(養眞堂. 金尙璘) : 1616년 ~ 1675년
도평의공파. 사원(士元)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양진당(養眞堂)이다. 숭선효우(崇先孝友)로 이름이 높았다. 만년(晩年)에는 양진당(養眞堂)을 세우고 학문(學問)을 연수(硏修)했다. 경술(庚戌) 신해(辛亥)의 팔도기근시(八道飢饉時)에는 영남(嶺南) 소수(疏首)로 추대(推戴)되었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2.능동 재실 1차 중건
중건 연대 : 1940년으로 추정
*추정 근거
(1)<음수재> 현판에 “庚辰 仲夏 *文演 印”의 기록이 있음. 경진년은 1940년임.
<음수재> 현판 書者 김문연(金文演)
안렴사공파. 화산군(휘 澍) 후손
주요 약력
○ 1900년대 전반 외부주사를 지냈고, 많은 종사활동과 저술활동을 하였다.
○ 1919년? 항우전, 몽학지남
○ 1926년 안렴사공파 세보 <병인보> 발간에 참여하여 서문을 짓고
○ 1933년 노정 김재철 조문객 명단에 문연, 주연 등이 함께 명단이 있고
○ ?1934년 주연 등과 함께 우암집을 보완 중간하고 권말에 전 외부주사 문연이 중간발을 썼다.
○ 1935년 대동보 <을해보> 발간에 참여하여 서문을 짓고
○ 1940년(庚辰 仲夏) 안동 녹전 죽송리 재실 음수재 현판을 書하였다.
○ 족보에 김문연 찬 [원류고증] 이 있다.
3. 능동 재실 2차 중건 --1970. 11. 7. 재실 완공. 낙성식. (내용:대종회 연혁에서 발췌)
대지 매입 : 대종회에서 1월 26일 재실 대지 2필지 438평 매입. 好振氏 대지 매입비 13만원 찬조
규모 : 正門行廊 一棟 約五間과 坍墻 74.5m, 廚舍 一棟 五間을 신축하였는데 貳百萬원이 소요
준공식 : 11월 7일 忠烈公 齋室을 단기간내에 완공하고 忠烈公 享祀와 아울러 400여명이 참석하여 준공식을 성대히 거행.
<음수재> 현판 : 종전의 文演氏(안렴사공파)께서 쓴 현판을 다시 달음.
1979. 충렬공 위토 730평 90만원에 추가 매입.
1980년(庚申). 대동보증보판을 착수하여 八月 十五日에 이백질 三千五百券을 완성하여 分帙하고 600萬원의 기금을 조성하였다. 4月 10日 忠烈公 재실을 270만원을 들여 보수하였다
1981년(辛酉). 안동시 풍산읍 회곡동 山 154番地 9000여坪을 50萬원에 매입하였다.
1982. 5. 2. : 忠烈公 影幀閣 신축. 八百六萬六千六百원을 들여 新築.
1984. 10. 7. 재실 관리사옥 건축
1)도평의공파 昌信氏 집이 헐리자 이 집을 기증 받아 그 재목으로 지음
2)12,416,000원으로 건축 완료
1993. 4. 陵洞 齋室 管理舍를 一千一百四十二萬二千원을 들여 보수하였고
1995. : 陵洞 位土畓 경지정리사업을 一百七十萬원을 들여 하였으며, 陵洞 齋室 寢具(담요) 60枚를 보충하는데 一百萬원
1996. 3. 28. : 개인명의로 된 위토 四匹地를 특별조치법으로 대종회 명의로 등기 이전하였다. 位土畓은 二十八萬원을 들여 정리 작업함
1998 : 상량문 목각 제작. 陵洞 齋室 上樑文(진종씨 찬)을 木刻 현판에 조각하여 게시하였는데 一百四十八萬三千원이 所要되었다.
*이 현액은 음수재 안에 게시하였었는데 2001년 3차 중건 이후 떼어서 관리사옥 창고에 보관중이라 함.
4. 능동 재실 3차 중건 및 과정
부지 확보 : 2001. 4. 2. 光山金氏 禮安派 會長 金俊植氏를 昌會副會長과 事務局長이 만나 影幀閣 敷地와 忠烈公 墓所 除下(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산19번지(現 忠烈公 墓所 除下)林을 우리에게 讓渡키로 合意하고 그 代價로 一金 壹千貳百萬원을 支拂하였다
등기 완료 : 2001. 4. 27. 讓渡받은 土地 竹松里垈 330番地를 330의1로 458평방미터(약15평)과 竹松里 山19번지를 19-1번지로 2,833평방미터(약936평)을 分割測量하고 7月5日 大宗會名義로 登記移轉을 畢하였다. 林野面積 936평중 260평이 종전 忠烈公墓所이나 持分登記로 되어있어 이를 말소하고 統合分割登記를 한 것이다
상량식 거행 : 6. 10. 飮水齋 上梁式을 工事 着手 3개月 만에 55명의 任員 및 宗員이 參席하여 精誠껏 擧行하였다
준공식 거행 : 11. 22. 宗親全員이 뜻을 같이하여 온갖 精誠을 다한 飮水齋 竣工式을 500여 後孫들이 雲集한 가운데 安東地域 關係機關과 儒林會員 地域 有志들의 激勵를 받으며 竣工式을 盛大히 擧行하고 11月 23日 忠烈公 701周忌 時祭를 奉享하였다
준공과정 요약 : 飮水齋 改築을 始作한지 19개月만에 竣工하였으며 獻誠金 合計가 貳億 貳仟七百參拾參萬 원이며 工事 代金 및 諸經費로 貳億貳仟七百六拾參萬參仟貳百九拾원이 支出 되고 九百 六十九萬六仟七百拾원이 남았는데 이 돈은 當初 個人 參拾萬원 以上 團體 五拾萬원 以上 獻金한 宗親과 團體를 獻誠碑에 刻字하여 紀念碑를 建竪키로 함에 있어 獻誠碑 建立基金으로 預置하였다
<음수재> 현판 : 대종회에서 종전의 현판(<음수재>)을 확대하여 다시 판각, 제작한 것이며 종전의 현판(1940년 제작)은 대종회에 보관중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