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렬공 金方慶 127---충렬공 재실 飮水齋(음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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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4-08-26 20:29 조회1,644회 댓글0건본문
<양진당기(養眞堂記)>
문소(聞韶)의 치북일사(治北一舍)의 허(許)에 노수장림(老樹長林)이 바람을 막아 섰고 천감토비(泉甘土肥)하며 지광인다(地廣人多)한 대촌(大村)이 있으니 명왈(名曰) 사촌(沙村)이다. 촌중(村中)에 우리 종문(宗門)의 구심처(求心處)인 종택(宗宅)이요, 그 동(東)편 백보(百步)의 자리에 양진당(養眞堂)이 있으니 선조(先祖)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 휘(諱) 상린(尙璘) 부군(府君)의 장수유식지처(藏修遊息之處)이다. 부군(府君)은 송만(松晩)의 정훈(庭訓)을 받은 직장공(直長公)의 오자중(五子中) 다섯째로 1616년(年) 광해 병진(光海 丙辰)에 태어나시니 용모(容貌)가 옥윤(玉潤)하고 기우(氣宇)가 헌활(軒豁)하며 학문(學問)을 익혀 향시(鄕試)에 합격(合格)한 바 있으나 과장(科場)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대개 사람들은 풍절(風節)이 높고 학문(學問)이 깊고 사문(師門)의 연원전수(淵源傳受)를 숭상(崇尙)하였으나 부군(府君)께서는 호고이민(好古而敏)하고 치심수신(治心修身)으로 성효독지(誠孝篤至)하고 백중제씨(伯仲諸氏)와 이이화락(怡怡和樂)으로 생활(生活)하며 지(知)보다 행(行)을 앞세워 숭선교자(崇先敎子)에 힘쓰고
중시조(中始祖) 충렬공(忠烈公)의 묘전(墓田)을 설치(設置)함에 원근(遠近) 종족(宗族)에 통의(通議)하
여 수합두곡(收合斗穀)을 근간(根幹)으로 식전매답(息錢買沓)하여 매세(每歲) 성전(省奠)에 임기(臨期)
취판(取辦)을 면(免)하게 하니 인향사부(隣鄕士夫)들이 이로써 법(法)을 삼았으며 1670년 현종(顯宗) 11
년(年)에는 본현(本縣) 명후(名侯) 이당규(李堂揆)가 교궁(校宮)의 전우(殿宇)를 중건(重建)할 제
감사(監司) 민시중(閔蓍重)을 통(通)하여 조정(朝庭)에 상계(上啓)하니 가납(嘉納)하시고
왕명(王命)으로 영건(營建)함에 시종(始終) 감역(監役)하여 모선상후(慕先尙後)에 공헌(貢獻)하였다.
경술(庚戌) 신해(辛亥) 양년(兩年)의 팔도(八道) 기근시(飢饉時)에는 구제책(救濟策)을 논의(論議)함에 일도다사(一道多士)가 부군(府君)을 소수(乞首)로 추대(推戴)하였고 1673년(年) 계축(癸丑)에는 조가(朝家)에서 지신청결(持身淸潔)하고 유심세무(留心世務)하며 처사명민(處事明敏)한 선비의 추천령(推薦令)이 내렸을 때 본향(本鄕)의 수천(首薦)으로 천거(薦擧)되니 이관징(李觀徵) 방백(方伯)이 기뻐하고 내가 항상(恒常) 기리는 선비라고 말하였으며 이원정(李元楨) 판서(判書)의 추천(推薦)으로 서령(暑令)에 임용(任用)코자 하였으나 글로서 사양(辭讓)하고 봉선추원(奉先追遠)의 예(禮)를 자질(子姪)에게 가르치며 흔화불염(藤和不厭)으로 정양(靜養)하면서 소당(小堂)을 짓고 이양천진(以養天眞)의 뜻을 살려 양진당(養眞堂)이라 편액(扁額)하니 지금의 현액(懸額)이다.
당(堂)의 창건(炷建)은 현종년간(顯宗年間)이며 장자(長子) 사주공(沙洲公)과 중자(仲子) 부사공(府使公)의 교유(交遊)로 인(因)한 하당(荷塘) 권두인 창설(權斗寅 蒼雪) 권두경 경옥재(權斗經 景玉齋) 이보(李囑) 대사간(大司諫) 남천(南天) 한경주부윤(漢慶州府尹) 남천택(南天澤) 등(等)의 명환(名宦)과 학자(學者)들이 내왕(來往)이 잦았다. 그 후(後) 1950년(年) 경인(庚寅) 신춘(新春)에 성상(星霜)의 누전(屢轉)으로 풍우(風雨)에 씻긴 옛 집을 주손(胄孫) 호기씨(浩驥氏)와 후손(後孫)들의 성력(誠力)으로 옛 규모(規模) 그대로 중건(重建)하니 곧 경인병란(庚寅兵亂)의 해다 오호(嗚呼)라 부군(府君)이 몰(沒)하신지 318년(年)이 지난 오늘 기송무징(杞宋無徵)을 한(恨)스러워하며 사주공(沙洲公)이 찬(撰)한 부군(府君)의 가장(家狀)과 본향(本鄕) 향교지(鄕校誌)를 근거(根據)로 전말(顚末)을 밝히면서 삼가 손을 씻고 기록(記錄)한다.
1993년(年) 계유(癸酉) 신춘(新春)
>
>1.능동 재실 창건
>
>창건 연대 및 건축과정 : 미상
>규모 : 3칸 초가
>관리 : 안동의 익원공파 소산문중과 사촌의 도평의공파에서 관리.
>
>창건 연대 및 과정 추정
>(1)추정 1 : 1626년 *하담공(휘 時讓. 제학공 후손) 묘역 정비시(범장한 광산김씨 김해의 묘 이장. 상석 세우기. 봉분 사초. 제절 넓히기 등) 소규모의 재실 창건 가능성.
>이 때는 위토가 없어 시제 때마다 사촌의 도평의공파와 안동의 익원공파 소산문중에서 제수비를 거출하여 시제를 모신 것으로 추정.
>(2)추정 2 : 1600년대 후반. *양진당(휘 相璘. 도평의공 후손)께서 위토를 장만한 이후 창건했을 가능성
>이 때부터 위토의 도지비로 시제를 모시기 시작함.
>
>(2)<國譯 晩沙文集>(金振鍾 저. 2003. 4. 金檍 발행) 내의 <陵洞齋舍 重建 上梁文> 내용 참조 확인.
>*晩沙公(휘 振鍾) : 1883-1951. 도평의공파 19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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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聞韶)의 치북일사(治北一舍)의 허(許)에 노수장림(老樹長林)이 바람을 막아 섰고 천감토비(泉甘土肥)하며 지광인다(地廣人多)한 대촌(大村)이 있으니 명왈(名曰) 사촌(沙村)이다. 촌중(村中)에 우리 종문(宗門)의 구심처(求心處)인 종택(宗宅)이요, 그 동(東)편 백보(百步)의 자리에 양진당(養眞堂)이 있으니 선조(先祖)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 휘(諱) 상린(尙璘) 부군(府君)의 장수유식지처(藏修遊息之處)이다. 부군(府君)은 송만(松晩)의 정훈(庭訓)을 받은 직장공(直長公)의 오자중(五子中) 다섯째로 1616년(年) 광해 병진(光海 丙辰)에 태어나시니 용모(容貌)가 옥윤(玉潤)하고 기우(氣宇)가 헌활(軒豁)하며 학문(學問)을 익혀 향시(鄕試)에 합격(合格)한 바 있으나 과장(科場)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대개 사람들은 풍절(風節)이 높고 학문(學問)이 깊고 사문(師門)의 연원전수(淵源傳受)를 숭상(崇尙)하였으나 부군(府君)께서는 호고이민(好古而敏)하고 치심수신(治心修身)으로 성효독지(誠孝篤至)하고 백중제씨(伯仲諸氏)와 이이화락(怡怡和樂)으로 생활(生活)하며 지(知)보다 행(行)을 앞세워 숭선교자(崇先敎子)에 힘쓰고
중시조(中始祖) 충렬공(忠烈公)의 묘전(墓田)을 설치(設置)함에 원근(遠近) 종족(宗族)에 통의(通議)하
여 수합두곡(收合斗穀)을 근간(根幹)으로 식전매답(息錢買沓)하여 매세(每歲) 성전(省奠)에 임기(臨期)
취판(取辦)을 면(免)하게 하니 인향사부(隣鄕士夫)들이 이로써 법(法)을 삼았으며 1670년 현종(顯宗) 11
년(年)에는 본현(本縣) 명후(名侯) 이당규(李堂揆)가 교궁(校宮)의 전우(殿宇)를 중건(重建)할 제
감사(監司) 민시중(閔蓍重)을 통(通)하여 조정(朝庭)에 상계(上啓)하니 가납(嘉納)하시고
왕명(王命)으로 영건(營建)함에 시종(始終) 감역(監役)하여 모선상후(慕先尙後)에 공헌(貢獻)하였다.
경술(庚戌) 신해(辛亥) 양년(兩年)의 팔도(八道) 기근시(飢饉時)에는 구제책(救濟策)을 논의(論議)함에 일도다사(一道多士)가 부군(府君)을 소수(乞首)로 추대(推戴)하였고 1673년(年) 계축(癸丑)에는 조가(朝家)에서 지신청결(持身淸潔)하고 유심세무(留心世務)하며 처사명민(處事明敏)한 선비의 추천령(推薦令)이 내렸을 때 본향(本鄕)의 수천(首薦)으로 천거(薦擧)되니 이관징(李觀徵) 방백(方伯)이 기뻐하고 내가 항상(恒常) 기리는 선비라고 말하였으며 이원정(李元楨) 판서(判書)의 추천(推薦)으로 서령(暑令)에 임용(任用)코자 하였으나 글로서 사양(辭讓)하고 봉선추원(奉先追遠)의 예(禮)를 자질(子姪)에게 가르치며 흔화불염(藤和不厭)으로 정양(靜養)하면서 소당(小堂)을 짓고 이양천진(以養天眞)의 뜻을 살려 양진당(養眞堂)이라 편액(扁額)하니 지금의 현액(懸額)이다.
당(堂)의 창건(炷建)은 현종년간(顯宗年間)이며 장자(長子) 사주공(沙洲公)과 중자(仲子) 부사공(府使公)의 교유(交遊)로 인(因)한 하당(荷塘) 권두인 창설(權斗寅 蒼雪) 권두경 경옥재(權斗經 景玉齋) 이보(李囑) 대사간(大司諫) 남천(南天) 한경주부윤(漢慶州府尹) 남천택(南天澤) 등(等)의 명환(名宦)과 학자(學者)들이 내왕(來往)이 잦았다. 그 후(後) 1950년(年) 경인(庚寅) 신춘(新春)에 성상(星霜)의 누전(屢轉)으로 풍우(風雨)에 씻긴 옛 집을 주손(胄孫) 호기씨(浩驥氏)와 후손(後孫)들의 성력(誠力)으로 옛 규모(規模) 그대로 중건(重建)하니 곧 경인병란(庚寅兵亂)의 해다 오호(嗚呼)라 부군(府君)이 몰(沒)하신지 318년(年)이 지난 오늘 기송무징(杞宋無徵)을 한(恨)스러워하며 사주공(沙洲公)이 찬(撰)한 부군(府君)의 가장(家狀)과 본향(本鄕) 향교지(鄕校誌)를 근거(根據)로 전말(顚末)을 밝히면서 삼가 손을 씻고 기록(記錄)한다.
1993년(年) 계유(癸酉) 신춘(新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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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능동 재실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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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연대 및 건축과정 : 미상
>규모 : 3칸 초가
>관리 : 안동의 익원공파 소산문중과 사촌의 도평의공파에서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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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연대 및 과정 추정
>(1)추정 1 : 1626년 *하담공(휘 時讓. 제학공 후손) 묘역 정비시(범장한 광산김씨 김해의 묘 이장. 상석 세우기. 봉분 사초. 제절 넓히기 등) 소규모의 재실 창건 가능성.
>이 때는 위토가 없어 시제 때마다 사촌의 도평의공파와 안동의 익원공파 소산문중에서 제수비를 거출하여 시제를 모신 것으로 추정.
>(2)추정 2 : 1600년대 후반. *양진당(휘 相璘. 도평의공 후손)께서 위토를 장만한 이후 창건했을 가능성
>이 때부터 위토의 도지비로 시제를 모시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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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國譯 晩沙文集>(金振鍾 저. 2003. 4. 金檍 발행) 내의 <陵洞齋舍 重建 上梁文> 내용 참조 확인.
>*晩沙公(휘 振鍾) : 1883-1951. 도평의공파 19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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