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36---숭의전 (경기 연천군 미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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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8 12:08 조회1,772회 댓글0건본문
경기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숭의전은
고려 4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충신 16공신(정몽주, 복지겸, 홍유, 신승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을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이곳 숭의전 공신각인 배신청에 고려시대 공신 16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충렬공 할아버지 위패도 모셔져 있습니다. 넓게 해석해 보면 고려시대를 통틀어 공신 16분중에 한 분이 바로 충렬공 할아버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숭의전
1451년(문종 1년) 前朝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 4왕과 고려조의 충신
복지겸(卜智謙)등 16공신을 배향하다. (이때에 고려현종의 원손(遠孫) 왕우지(王牛知)를 찾아
숭의전 부사(副使)로 삼고 순례(循禮)라 이름지어 주어 왕씨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함)
숭의전은 조선 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현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었으나 세종때 조선의 종묘에는 5실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8왕을 제사함은 합당치 않다는 유사의 헌의에 의해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4왕만을 제사 지내게 되었으며 문종때 선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충신 16공신(정몽주, 복지겸, 홍유, 신승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을 제사 지내게 되었다.
6.25로 전소된 것을 1971년 12월 28일 문화재 보호법에 의해 사적 233호로 지정하고
72-73년 왕씨 후손과 국비, 지방비의 보조로 복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며
4왕 16공신을 제사 지낸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이태조가 등극하자 고려 왕조의 종묘 사직을 없앨 생각으로
송도에 안치된 고려 왕의 위패를 배에 실어 송도 앞에 흐르는 예성강에 실어 띄워
보냈는데 임진강과 합류 지점에 도달한 후 임진강을 역류하여 강원도 철원과의
경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이리 썩은소에서 하루를 정박한후에
3km 아래에 있는 앙암사 석벽에 머루르게 되었으며 그날 밤 앙암사는 폭우와
천둥벼락으로 순식간 폐허로 변해버렸다. 당시 마전군수는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 이듬해인 태조 6년 앙암사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또한 앙암사가 파괴될 당시 경내의 범종이 임진강으로 굴러 물속에 잠겼는데
그 후 이 못에서 국난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소리가 울려 미리 예견했다하여
이못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인용
사묘
崇義殿(숭의전):군 서쪽 5리에 있는데,본조 태조 원년에 예조(禮曹)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太祖),혜종(惠宗),성종(成宗),현종(顯宗),
문종(文宗)원종(元宗).충렬왕(忠烈王) 및 공민왕(恭愍王)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祭田)을 주었다. 세종(世宗)7년이 되어 유사(有司)들이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宗廟)에도 다만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前朝)의
사당은 팔위(八位)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는다 하므로, 태조,현종,문종,원종만
남겨 놓고, 봄.가을 이중삭(二仲朔)으로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했다.
문종(文宗)2년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복지겸(卜知謙),
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유금필(庾-黑+今-弼),배현경(裵玄慶),서희(徐熙),
姜邯贊(강감찬),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김취려(金就礪),조충(趙충),
★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정몽주(鄭夢周)등을 배향했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종 목 사적 223호
명 칭 숭의전지 (崇義殿址)
분 류 전지
면 적 17,851㎡
지정일 1971.12.28
소재지 경기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7
시 대 조선 태조
소유자 국유,사유
관리자 연천군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전각을 세웠고 정종 원년(1399)에는 태조 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제사를 지냈다. 그후 세종 5년(1423), 문종 2년(1452)에 고쳐 지었다. 문종 때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왕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의 충신 15명을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건물의 관리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 유민을 무마하여 왕족의 불평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가 이를 계승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되었다.
완강하게 조선을 거부하였던, 고려시대의 왕씨 문중들이 갖가지 설움을 억누르면서 옛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문화재명 숭의전지(崇義殿址)
숭의전(崇義殿)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고려 태조(太祖)를 비롯한 7왕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여 제사 지내던 사당(祠堂)이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자 고려왕조의 종묘사직을 없앨 생각으로 여왕(麗王)의 위패(位牌)를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웠더니, 배는 물에 떠내려 가지 않고 안하(岸下)에서 부동(不動)하므로 왕씨 자손이 남몰래 위패(位牌)를 거두어 이 곳에 묘(廟)를 짓고 이를 봉(奉)하였다고 한다. 후일 이 사실을 안 이태조(李太祖)는 그의 6년(1397년)에 연천군 미산면에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묘전(廟殿)을 세웠고, 정종(定宗) 원년(1399)에는 태조(太祖)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7왕을 제사 지냈으며, 세종 5년(1423년), 문종 2년(1452)에 중건했다. 이후에 역대군왕(歷代君王)이 수리하고 왕건 태조를 봉사(奉祀)하였고, 제 5대 문종조(文宗朝) 때는 전조(前朝)를 예우(禮遇)하여 숭의전(崇義殿)이라 이름지었고, 고려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4왕의 위패를 모시고 이와 함께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선생 외 열 다섯 분을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 숭의전(崇義殿)의 관리도 고려왕족의 후손에 맡겼는데,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유민을 무마하여 왕족의 불평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도(方途)였다. 아울러 선조(宣祖) 때는 여조왕씨(麗朝王氏) 후예로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여 전각(殿閣)의 수호와 향사를 보게 하였다. 일제시에도 조선총독부가 이를 계승하였던 곳인데, 6·25동란으로 전각(殿閣)이 소실되었다.
1971년 12월 28일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사적 (史蹟)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에는 왕씨후손이 정전(正殿)을 복구했고, 국비 및 지방보조로 1975년 2월에는 배신청(陪臣廳)(13평)을 1976년 1월에는 이안청(移安廳)(8.7평)을 1977년 2월에는 삼문(三門)을 신축하였다.
이 숭의전(崇義殿) 일대는 임진강안(臨津江岸), 단애절벽상(斷崖絶壁上) 경승지로서, 노수 (老樹)가 울창하여 전각(殿閣)을 싸고 각하(脚下) 일대는 만경창파(萬頃蒼波) 회변유수(回邊幽水)한 별천지(別天地)이며, 여조 (麗朝)의 왕씨(王氏)문중들이 완강하게 이씨조선(李氏朝鮮)을 거부하였고, 갖가지 설움을 억누르면서 전조(前朝)를 흠모한 충절(忠節)이 깃들여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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