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문집 발간 및 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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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1-12-29 17:44 조회1,916회 댓글0건본문
<荷潭 金時讓 文集> 발간 및 배포
3년여 동안 준비했던 <하담 김시양 문집>이 발간되어 아래와 같이 발간식을 갖고 현재 전국에 배포 중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아울러 문집을 필요로 하시는 분도 아래의 구입 방법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 래---------------------------
1. 발간 준비 및 배포 일정
1)번역 및 윤문, 편집 작업 : 1998. 11 -- 2001. 11.
2)인쇄 : 2001. 11-12.
3)배포 : 2001. 12.--2002. 1.
2. 발간식
1)일시 : 2001. 11. 25(일).
2)장소 : 세덕사(-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진리.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회 사당)
3)인원 : 약 40여명 참석
4)감사패 전달 : 金益洙(번역자), 金恒鏞(편집자. 문집 발간 추진운영자)
3. 발간 추진회 구성표
1)고문(3) : 金鶴應, 金泰燮, 金濟應
2)원로위원(다수) : 金相天, 金相春, 金元應,
3)추진위원장(1) : 金斗應
4)자문위원(다수) :金駿應, 金佐應, 金泰榮, 金奎泰, 金奎棟
5)부위원장 : 金益洙(번역자)
6)편집 및 운영위원장 : 金恒鏞
7)후원회 :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후손 일동
4. 문집 및 구입 방법 소개(비안공 후손들에게는 이미 우편으로 송부하였음)
1)문집명 : <하담 김시양 문집>(원명 <忠翼公 荷潭先生 遺稿>)
2)규격 : 850P(원문 부록 수록). 양장 하드표지. 700부 인쇄
3)배부
가) 2002. 1.-전국 도서관 및 대학교, 문화원, 전문 연구인에게 무료 배부 예정.
나) 하담공 후손들에게는 권당 70,000원에 배부
다) 비안공 후손 중 하담공 방손들에게는 권당 50,000원에 배부
※후손으로부터 받는 문집 대금은 본 문집 발간비 3000만원 중 기금 1000여 만원을 제외한 부족금에 충당하게 됨
4))구입방법 : 대금 납부후 신청소로 전화하여 우송 받음.
가)신청 연락처 : 02)2613-0842(김두응), 02)451-5278, 011-892-5273(김항용)
나)문집 대금 납부처 : 국민은행, 345-21-0217-311, 김항용
5.하담 선조님 및 문집 내용 소개
1)<충익공(忠翼公)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 소개>
충익공. 휘 시양(時讓) : 1581(선조 14)---1643(인조 21).
출생지는 충북 괴산이다. 초명(初名)은 시언(時言)이며 字는 자중(子中)이고 아호는 하담(荷潭)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581년(선조 14)에 출생하여 성장하면서 그 재능이 영특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장래에 대한 기대가 지대하였다.
1605년 (선조 38, 25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
1607년(선조 40, 27세)에 당상관이 되었고 1609년(광해 1년, 29세)에 의랑지제교(義郞知制校)로 승진하였다.
1610년(광해 2, 30세)에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연경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 4, 32세)에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어 지방 향시를 관장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냈다 하여 의금부에 잡혀갔다. 이때 금부에서는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백사 이항복의 도움으로 감형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1618년(광해 10, 38세)에 영해로 귀양지가 옮겨졌다. 이 귀양기간에 공은 옛날의 전적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종성은 육진(북방의 국방 경비대)의 하나로 학문으로 업을 삼는 이가 없었는데 공이 도착하자 많은 이가 배우러 와서 학문을 성취하였고, 그 이름이 조정에 등재 된 자가 이때부터 이어졌다. 후에 이곳 사람들은 공(公)이 몰(歿)하자 공(公)을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아 공(公)을 현인(賢人)에 끼어 제사 지냈는데, 이는 조주(潮州·주:지금 중국의 廣東省潮安縣) 사람들이 한문공(韓文公-韓愈)을 사당에 모셨던 것과 같은 도리였다고 한다.
1623년(인조 1, 43세)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귀양에서 풀려 예조·병조의 정랑이 되었다가 유장들이 추천하여 홍문관으로 올라갔다. 그 후 수찬관(修撰官)이 되었고 의주부윤을 배명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가을에는 교리(校理)로서 암행어사가 되어 북방을 안찰(按察)하다가 순무사(巡撫使)까지 겸하였다.
1624년(仁祖 2, 44세)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리 이귀(李貴)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부찰사 이시발(李時發)과 더불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로써 공은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올랐고 난이 평정된 후 교리로 돌아왔다. 그 공으로 말 1필을 하사 받았다. 겨울에 전좌정랑(銓佐正郞)에 춘방사서(春坊司書)를 겸하였다.
1625년(인조 3, 45세)에 이조정랑, 응교(應敎)로 승진되어 시강원(侍講院)의 문학을 겸하였다.
1626년(인조 4. 46세)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기용되었다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중시조이신 충렬공의 묘역을 정비하고 상석(床石)을 세웠다.
1628년(인조6, 48세) 12월에 동부승지로 입궐하였다.
1629년(인조 7. 49세)에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다.
1631년(인조 9. 51세)에 병조판서, 6월에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가 되었다.
1632년(인조 10. 52세) 지경연 판의금부사를 겸함. 가을, 청나라의 과도한 조공 요청이 있자 인조는 이에 거부하는 교서(敎書)를 청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이때 공은 교서를 갖고 청나라로 가는 사신을 정지 시켜놓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극진히 올림. 이로 인해 임금의 노여움을 사 영월로 귀양갔다가 곧 공의 말이 옳음을 알고 다시 풀려났다.
1633년(인조 11. 53세) 1월에 체찰사에서 병조로 돌아 왔으며, 형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2월에 사도 도원수(四道 都元帥)가 되었다.
1634년(인조 12. 54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한성판윤(漢城判尹),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옮겼다가 또 호조판서 겸 동지(同知) 춘추(春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으며, 9월에 병조판서 겸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10일만에 눈에 백태가 끼어 사직하고 충주의 사제(私第)로 돌아왔다.
1635년(인조 13. 55세) 강화도 유수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인조 14. 56세)에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637년(인조 15. 57세) 봄, 병자호란 후 임금이 환도하여 공을 세 번이나 불렀으나 병으로 인해 상소로써 사양하였다. 다시 간곡한 임금의 부름에 상경하니 임금은 공의 병 치료를 위해 약을 내리기도 하였다.
1638년(인조 16. 58세) 5월에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명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수개월을 객사에서 머물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임금의 간곡한 청으로 다시 상경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선조실록을 개수하게 되었는데 여러 조정중신들이 공(公)을 원하므로 임금은 공(公)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춘추관사를 겸하여 주었다. 그러나 공은 여러 번 상소로써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부름에 응하여 상경하다가 여주에서 병이 중하여 상소를 올린 뒤 임금의 하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충주의 집으로 돌아왔다.
1643년(인조 21. 63세) 5월 4일 충주의 사제(私第-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서 별세하였다. 임금이 관곽(棺槨)과 조묘군(造墓軍)을 내려주었고, 8월 18일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일명 방아재) 자좌오향(子坐午向) 선영하에 안장하였다.
회령의 사당에 위패(李潤雨와 함께)를 모셨다. 숙종 7년 8월에 김상헌, 조석윤, 정온을 제사지내는 서원 안에 공의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사 지내게 하였다.
숙종 16년. 5. 13. 우의정 김덕원(金德遠)이 심희수(沈喜壽)와 함께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공은 자손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도록 유언하여 청하지 않고 있었음). 숙종 17년 7. 21. 충익(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저 서 : <忠翼公荷潭先生遺稿>八卷 - 부계기문( 溪紀聞), 자해필담(紫海筆談),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소차(疏箚), 각종 한문체의 글, 각종의 시(詩), 임자일기(壬子日記), 유사(遺事),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1670년(현종 11) 경에 공의 아들인 판서공(휘 徽)이 공의 글들을 편집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친필 유품인 <荷潭雜記>가 중앙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 물 : 관대 1점(1631년 인조 9. 병조판서 배명시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
신도비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원명-<忠翼公 荷潭先生 遺稿>, 역문-<荷潭 金時讓文集>)
2)<문집 내용 소개>
가. 부계기문(倍(인변 대신 삼수변)溪紀聞) : 하담공(荷潭公)이 광해군 4년(1612)에 함경북도 종성(鐘城)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 집필한 견문수필집(聞見隨筆集)으로 부계는 종성의 딴 이름이다. 주로 당시의 인물 평론에 중점을 둔 수필이다.
나. 자해필담(紫海筆談) : 하담공이 광해군 10년(1618)에 경북 영해(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해)로 귀양지가 옮겨 진 후 쓴 수필집이다. 국가와 정치·정치인·현인·달사·악인 등에 대한 충격적인 사건과 범상하지 않은 일, 기담(奇譚)·이사(異事)에 속하는 일들을 채록(採錄)하고 있다.
다. 하담 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공의 세 가지 수필집 중 양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가장 으뜸 되는 것이다. 부계기문과 자해필담의 특징을 다 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의 다사다난하던 때의 복잡하고 반복무쌍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이면사(裏面史)를 엄정하고 강직하고 정밀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이야기, 이 괄(李适) 반란, 당쟁의 이면사, 광해의 황음(荒淫)과 폐모 사건(廢母事件), 인조반정(仁祖反正), 많은 현사·악인·권간과 충신들의 숱한 사연과 사적 등이 적혀있다.
라. 소차(疏箚) :임금에게 올린 글(상소문) 들이다. 41개의 상소문(上疏文)과 차자(箚子)를 통해서 공의 국사에 관련한 탁월한 지혜와 용기, 청렴결백한 공직자로서의 자세 등을 엿볼 수 있다.
마. 각종의 한문 문체들 : 論,序,記,說,書 등에서 공의 기발한 이론, 아름다운 문장, 탁월한 의견, 시대와 역사에 대한 합리적 관점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바. 시부(詩賦)와 각종의 시문들:시부(詩賦)와 368수에 이르는 詩文이 있다. 여기에는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오던 때부터 12년에 걸친 오랜 유배생활 동안의 풍부한 시상(詩想)에 의한 시들, 방면 후 각종 관직에 임하던 과정과 만년의 심회를 표현한 시 등, 당시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공(公)의 문학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구슬 같은 시어(詩語)와 아름다운 표현의 서정시, 사실감 있는 묘사에 극찬을 받은 사경시(寫景詩), 백성들에 대한 부역과 관권의 횡포에 대한 공(公)의 괴로움이 잘 나타나 있는 서사시, 가족(처,자,형제)들과 관련한 가정시 등이 있다.
사.임자일기(壬子日記),유사(遺事),신도비명(神道碑銘):임자일기(壬子日記)는 유배를 가게된 시제(試題)사건의 시말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알리려한 것이며, 유사(遺事), 신도비명(神道碑銘)은 하담공의 인물됨과 가계(家系)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6. 2001. 11. 25. 발간식을 마치고 후손들과 추진위원들이 하담공 묘소를 찾아 봉정례를 올리며 고한 고유문
<告 由 文>
忠翼公 14代傍孫 恒鏞 謹撰
維歲次 辛巳 十月 壬午朔 十一日 壬辰에 十二代孫 斗應을 비롯한 後孫 및 傍·裔孫들은 崇祿大夫 判中樞府事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事 世子 左副賓客 四道體察使 贈諡 忠翼公이신 先祖님께 삼가 고하옵나이다.
오늘 선조님의 時祭日을 맞아 世德祠에서 온 門中 後孫들이 모여 儀式에 따라 경건하게 祭禮를 올렸사옵나이다. 멀리 계신 선조님을 생각하노라니 끝없이 추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
지금 저희들은 공경하옵는 선조님의 한없이 높으신 철학과 올곧은 정신, 高貴하신 삶의 軌跡이 集大成 되어 있는 <忠翼公 荷潭先生 遺稿>의 번역본인 <하담 김시양 문집>을 우리 후손들의 힘으로 發刊하매 이곳 묘소에 다시 모여 선조님께 고하고 拜禮를 올리고 있사옵나이다.
선조님께서는 이 民族 最大의 危機요 激動의 時期였던 조선조 中期에 탄생하시어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시었고, 일찍이 書와 經, 그리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문 및 역사를 꿰뚫으셨으며, 文科에 及第하시어 관직에 나아가셨습니다.
그 뒤 권신들의 모함으로 鍾城과 寧海에서 12년의 귀양살이가 있었지만 오히려 學問은 더욱 높아지셨고, 그곳에서도 학문을 일으키시어 많은 인사들을 배출하셨으며, 그 공으로 회령의 지역 유생들이 선조님의 위패를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放還된 뒤로는 오직 淸廉과 潔白으로 관직에 임하셨고, 깊은 愛民의 마음으로 牧民官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셨으며, 功臣들의 得勢로 인해 冷冷하기만 한 朝廷 분위기에서도 탁월하신 지혜와 통찰력으로 탄핵 한번 받음 없이 당시의 국가 중대사를 명쾌하게 처결해 나가셨습니다.
慶尙道와 平安道의 觀察使, 兵曹判書 및 都體察使를 역임하시고 1품의 품계인 判中樞府事에 오르신 뒤 淸白吏에 錄選되시고 晩年 鄕地인 忠州의 荷潭里에서 유유자적하실 때까지 선조님께서는 이 民族의 恒久한 숙제인 중국과 일본과의 국제적 갈등에서 빚어진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의 비극적 전란을 겪으셨고, 내부로는 東人과 西人의 黨權다툼과 權臣들의 횡포 등으로 인해 혼란하고 험난하기만 했던 시기를 朝廷 重臣으로서 오직 멸사봉공의 자세로 탁월하신 지혜를 모아 때때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셨습니다. 또한 이 민족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앞장서시고 많은 빛나는 업적을 이뤄 내셨사옵니다. 그로 인하여 선조님의 名聲은 우리 民族史에 偉大한 名人으로 기록되었고 우리들과 민족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등불로 높이 顯揚되고 있사옵나이다.
이제 36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토록 훌륭하신 선조님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에 더 없는 긍지와 자랑스러움을 가슴깊이 새기고 잊지 않고 있사옵나이다. 특히 오늘에 이르러 선조님의 理念과 哲學, 삶과 업적, 思想과 感情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한문본 <荷潭文集>을 번역하는 사업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들은 선조님의 위대한 업적을 낱낱이 알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모든 이들에게 선조님의 偉大性을 널리 알릴 수 있는 契機가 되었사옵니다.
먼 곳에서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 荷潭 先祖님이시여!
이곳에 있는 우리들이 선조님의 높으신 뜻과 精神을 이어받아 荷潭 後孫으로서 따스한 德을 지니고 盡人事待天命과 滅私奉公을 가슴 깊이 새겨 淸白吏의 후손답게 바른 삶을 살아가는 후손들이 될 수 있도록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이에 告由 拜禮를 올리오며 번역본 <荷潭 金時讓 文集>을 靈前에 奉呈하오니 降臨하시와 거두시옵소서.
200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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