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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와 上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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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05 00:01 조회1,5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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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지방사회 (2002, 박종기, 푸른역사)

<고려사 지리지>

(주현) 상주목
--- (속군) 문경군, 용궁군, 개녕군, 보령군, 함창군, 영동군, 해평군
--- (속현) 청산현, 산양현, 화녕군, 공성현, 단밀현, 비옥현, 안정현, 증모현, 호계현, 어매현, 다인현, 청리현, 가은현, 일선현, 군위현, 효령현, 악계현

(주현) 안동부
--- (속군) 임하군, 예안군, 의흥군
--- (속현) 일직현, 은풍현, 감천현, 봉화현, 안덕현, 풍산현, 기주현, 흥주, 순안현, 의성현, 기양현



■ 상주지명총람 (2004, 조희열 편, 문창사)

1005년 尙州는 안동도호부에 속했다. 안동은 金州(지금의 金海) <고려사 지리지>
1012년 안동대도호부(◁김해)가 되었다.(◁속했다.)
1014년 상주는 별호를 ★上洛, 호를 商山이라 했다. <고려사 지11 지리 경상도 상주목>
1018년 상주목이 되었다.

▶1196년 백운 이규보(1168-1241)는 어머니 찾아 상주에 가서 화개사(현 미상), 용담사(현 낙동면 용담리)에 들리다. <동국이상국집>

▶동산수 최자(1188-1260)는 1212년 상주 사록을 지내고, 1241년 상주목사로 와서 1244년까지 재임하였는데, 보한집에 ---나(=최자)는 ★상락(上洛) 장서기(掌書記)1)로 있다가, 후에 그곳 태수로 부임하였는데--- 라고 적고 있다. 이때 미면사( 문경 대승사 남쪽 10리에 있던 미면암)를 개축하고, 사불산(공덕산) 백련사를 중수하였다. 석 진정(1214-1259)이 상주 산양현 북쪽 산인 사불산(공덕산)에 들러 <사불산 유산기>를 남기고 있다. <최자의 보한집>

1275년 안유를 상주판관으로 삼았다.

▶1282년 문영공(김순)은
임오년(壬午年)에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승진하고 그 이듬해에 상주판관으로 나가서 선정(善政)한다는 소문이 들어오니 일년도 못되어 불러들여--- <1321년 민지 찬 문영공 김순 묘지명>

1314년 경주와 상주의 머리 글자를 따서 경상도라 했다. <고려사 지리지 지리2 경상도>

▶1327년 정간공(김영후)는
(36세) 충숙왕14년 1327년 4월에 상주목사가 되어 객관(상주 상산관)을 완성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안축의 근재집 상주객관중영기>,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수기>
법주사 자정국존이 입적하기 직전(정묘년, 충숙왕 14년-1327) 12월 1일 아침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1342 이숙기찬 전원발서 법주사자정국존비문>

1361년 공민왕이 ★福州(지금의 안동)으로 피난했다. <동사강목>

▶척약재 김구용(1338-1384)이 상주의 佳里坊(가리방)에 은거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 1375년 권신들과 마찰로 죽주로 귀양 가서 방면되던 해인 1381년 사이에 상주에 우거한 것은 아닌가 싶다. 佳里坊은 당시 靑里縣에 속한 西北 북록 일대로 현재는 佳庄里(가장리) 일대라 짐작된다. <奇呈太子山日寧>, <贈李敏道> 시에서도 역시 商山에 우거했음을 알 수 있다. <상주 한문학, 2002, 권태을, 문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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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가지 동쪽에 洛東面이 있는데, 낙양과 ★上洛의 동쪽이라 하여 洛東이라 한다.
상주시 서쪽에 洛西里가 있는데, 낙양과 ★上洛의 서쪽이라 하여 洛西라 한다.




■ 충렬공 상락군개국공 훈작 (?1283년, 1295년)

○ 72세, 1283년
---12월에 중찬 김방경이 퇴직하기를 청하니, '추충정난 정원공신 ★상락공(推忠靖難定遠功臣上洛公)'의 작호를 더하여 치사(致仕)하게 하였다.(고려사절요),

○ 84세, 1295년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을 봉(封)하시고 식읍(食邑) 1천호에 식실봉(食實封) 삼백호(三白戶)를 받으셨다.(충렬공행장)
---이어(=?1295)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고려사)
---봄 정월에 홍자번(洪子藩)을 첨의령(僉議令)으로, 조인규(趙仁規)를 첨의중찬으로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에게 첨의령을 가자하였다.(고려사절요)
---김방경(金方慶)에게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의 작위를 주었다.(고려사절요)
---"나이가 84세가 되어 --- 세자(=충선왕) 전하께서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
★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公)으로 삼으니 이는 후현(後賢)들의 길을 넓힌 것이다.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궤杖) 아래에 바칩니다. (동안거사집)



■ 김순 묘지명 (1321, 민지 찬)

기해년(己亥年)에 공께서 그칠 줄을 아시고 벼슬을 사퇴하셨다. 그 이듬해 8월에 선친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유원(遺願)에 의하여 고향 선영(先塋)에 장례를 모셨다. 경술년(庚戌年) 겨울에 선친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임자년(壬子年)에 다시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을 봉하여 선친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을 이어 받았다.



■ 충렬공 현손 김사형(金士衡)

1333(충혜왕 2)∼1407(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46)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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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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