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속의 도산 안창호(1878-193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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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07 22:04 조회1,603회 댓글0건본문
■ 안창호 평전 (2004.9, 청포도)
p.75
● 도산을 애도하는 글 (백범 김구)
대한민국 30년(▶1948년) 3월 10일에 김구는 삼가 고 도산 안창호 동지 선생 영전에 수언(數言)을 올리나이다.
선생이여, 거금(距今) 15년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해에서 적괴 시라카와 등을 박살함으로써 찬란한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창조하던 그날, 우리는 선생을 적에게 빼앗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척에 있는 왜(倭) 영사관에서 선생을 구출하려고 우리의 뇌즙(腦汁)을 짜내볼 대로 짜보았던 것입니다. 이 운동에 있어서는 지금 우리나라 서울에 와 있는 미국 친우 피치 선생 부부의 노력이 자못 컸던 것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실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은 필경 수포로 돌아가고, 선생은 적의 포로가 되어 한 많은 고국에 돌아와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왜적을 타도하고 자유로운 조국강토 위에서 선생을 맞이하고자 밤낮으로 하느님께 선생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도우시지 않았는지 우리의 악운이 미진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선생은 드디어 적의 독해(毒害)를 입어 옥중에서 서세(逝世)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입국(立國)하기는 선생이 서세하신 후 7주년이 되던 해입니다. 우리는 입국한 그때부터 동포들과 손을 맞잡고 선생의 다하지 못한 유업을 완성하고자 분투 노력하였나이다. 그러나 이룬 것도 하나도 없이 이제 동지들과 함께 선생의 서세 10주년을 맞게 되니 한갓 무량한 감개만 금할 수 없나이다.
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분(分)으로 보면 그 중 7분은 우리의 애국적 선열 선현들의 피땀일 것이요, 그 7분 중에는 선생의 노력이 또한 중요한 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 최후의 3분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우리의 해방은 사전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안 될 기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해방이 왜적을 몰아 쫓아내 준것만은 감사한 일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통일과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분열과 구속과 불행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해방의 환희도 벌써 지나간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누워 계시고 이 몸이 숨쉬고 있는 남한의 정세를 볼지라도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날마다 늘어가는 것은 실업자뿐입니다. 이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서울 안에서만 얼어 죽은 자가 61명인데, 그들은 거의 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재해를 입은 동포라 합니다. 그 외 행려 병사자가 금년 1월 한 달 동안에 111명이라 하는 바 이것은 작년 1월중 70명에 비해 41명이 격증된 것이며, 작년 1년도 599명에 비하여 벌써 5분의 1의 놀랄 만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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