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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등금수정기(始登金水亭記)>이상수(李象秀)「오당집(梧堂集)」권13〕<금수정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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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4-09-07 22:13 조회1,9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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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수정(金水亭) 양사언(楊士彦) 각자(刻字) ▣
                                                                                               오세옥(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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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각자(刻字)는 모두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년:중종12~1584년:선조17)의 글씨로서,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에 있는 금수정(金水亭) 아래를 흐르는 영평천(永平川) 가운데 바위에 새겨져 있다.

  금수정(金水亭)은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지만 영평팔경(永平八景·영평은 이곳의 옛 현명)의 하나로 가파른 절벽과 울창한 수목이 절경을 이루어 이곳을 방문한 이들이 즐겨찾은 유람처였다. 금수정은 錦水亭이라고도 하였는데, 김확(金矱·1572~?)을 비롯하여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누대(累代)에 걸쳐 전해온 구업(舊業)으로 도중 훼손된 것을 확(矱)의 후손 택인(宅仁)이 중수(重修)하였다 한다.
[채제공(蔡濟恭) 금수정중수기(金水亭重修記)·정범조(丁範祖) 금수루중수기(金水樓重修記)〕

  금수정 아래로 백운산(白雲山)에서 연원한 영평천이 절벽을 휘감아 돌면서 내려가고 10m쯤 내려가면 내 가운데 흰바위 수개가 떠 있듯 솟아있는데 여기에 이 두 각자가 새겨져 있다. 이중 ‘瓊島(경도)’가 새겨져 있는 큰 바위는 가운데가 우묵하게 패여 있어 술잔처럼 보이므로 ‘尊岩(준암)’이라 불리워졌다. 준암 역시 ‘경도’ 측면에 봉래의 글씨로 각자되어 있으나 많이 마모되어 있다.
  ‘경도’라고 새긴 것은 금수정의 절경이 비치는 물결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준암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중국 북경(北京)의 황성내(皇城內) 서원(西苑) 태액지(太液池)에 ‘경도’라는 소도(小島)가 있는데 경사팔경(京師八景)의 하나로서 묵객(墨客)들이 음유(吟遊)하였다하니, 거기에 비유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각자는 대서(大書)와 초서(草書)에 능한 봉래의 필치를 한 눈에 접할 수 있다.

  아래 초서(草書)로 새겨진 시(詩)는 <증금옹(贈琴翁)>이란 제목으로 「봉래시집(蓬萊詩集)」권1에 실려 있다. 이 시는 ‘경도’가 있는 준암에서 천변(川邊) 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세필(細筆)로 그은 것같은데다 거의 마모되어 식별도 불가능한 상태이다.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綠綺琴伯牙心 거문고 타는 백아의 마음은
鍾子始知音   종자기만 알아 듣는다오.
一鼓復一吟   한번 타매 또 한번 읊조리니
冷冷虛籟起遙岑 맑디 맑은 바람소리 먼 봉우리에 일고
江月娟娟江水深 강달은 아름답고 강물은 깊기도 해라.
蓬海書

  이 시의 제목에 달은 세주(細註)에 ‘금옹(琴翁)은 금수정(錦水亭) 주인(主人)이다. 이 시를 준암에 새긴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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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재(惕齋) 이서구(李書九·1754~1825)도 금수정에 유람하며 칠언율시(七言律詩) 1수(首)를 남겼는데, 정자의 승경(勝景)과 봉래가 남긴 암각시(岩刻詩)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翠柏丹楓擁一邱 잣나무 단풍나무 둘러싼 언덕
名亭勝槪水纖 좋은 경치 이름난 정자 물 서쪽에 자리했네.
川聲暮挾平郊雨 저물녘 시냇물 소리는 들판의 빗소리인듯
山勢遙圍小縣秋 작은 마을 휘감은 산 빛은 가을이어라.
客子登臨分物色 나그네는 올라와 경치를 구경하는데
主人高臥自風流 속세를 떠난 주인은 그대로 풍류일세.
蓬萊仙侶今安在 봉래신선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惟見銀鉤石上留 그가 쓴 초서(草書)만이 돌위에 남아 있구나.
〔「척재집(惕齋集)」금수정(金水亭)〕

  양사언의 자(字)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해객(海客) 등,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24세때 <단사부(丹砂賦)>를 지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8세때 문과(文科)에 급제, 대동승(大同丞)이 되었다. 그 후 삼등현령(三登縣令)을 거쳐 37세때 함흥군수(咸興郡守)가 되었다가 병으로 귀향하였다. 이어 43세때 평창군수(平昌郡守), 56세때 강릉부사(江陵府使)를 각각 지냈으며 강릉부사 재임시에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부민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과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내고는 다시 외직을 구하여 회양(淮陽)·철원군수(鐵原郡守)로 나갔다. 이때 금강산(金剛山)을 자주 유람하여 시문을 짓고, 만폭동(萬瀑洞) 석각(石刻) 대서(大書) 8자(蓬萊楓嶽元化洞天)를 비롯한 암각(岩刻)을 남겼다 한다. 64세때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어서는 효제(孝悌)로서 부민을 교화하여 퇴폐한 풍속을 바로잡았으므로 통정(通政)에 올랐다. 그러나 지릉(智陵)화재사건에 연루되어 해서(海西)에 유배되었다가, 68세때 2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귀향하려는 중 병졸(病卒)하였다.〔조경(趙絅)「용주유고(龍洲遺稿)」권15 묘갈(墓碣)〕
  봉래는 당대 명필로서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전기 4대서예가로 불렸다. 또한 문장가로도 이름이 나 초당(草堂) 허엽(許曄)·손곡(蓀谷) 이달(李達)·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등 일류문인들과 교유하며 시(詩)·가사(歌詞)·시조 작품을 남겼으니, 그의 유고는 「봉래시집(蓬萊詩集)」과 「봉래유가(蓬萊遺歌)」에 실려 전한다.

  ‘양봉래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선친(초당 허엽)과 사마(司馬)·문과(文科)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行書)·초서(草書)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山水)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로 결은 나막신 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은 날이 없었다.’〔허균「성소부부고」부록1 학산 초담〕
  ‘안변부사에 있을 때는 공무를 제쳐두고 10일 이상씩 산수(山水)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蓬類說)」〕

  이런 기록들에서처럼 봉래는 산수유람과 금서(琴書)를 일생 반려자로 삼은 풍류객이었으니, 위 두 각자(刻字)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봉래는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에서 태어났고, 금주산[金柱山·일명 금조산(金鳥山)] 아래 이동면 길명리에 복거(卜居)하였는데 그 집을 ‘평망정(平望亭)’이라 하였다. 그의 묘소도 복거지(卜居地) 위의 금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46세 때는 고성군(高城郡) 구선봉(九仙峯) 아래 감호(鑑湖) 위에 ‘비래정(飛來亭)’이라 이름한 정자에 복거한 적도 있으나 일생 중 많은 기간을 이곳 포천에서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로주(白鷺洲)·선유담(仙遊潭)·현내의 명산(名山) 등 포천 일대 경승지에는 그의 시문이 많이 남아있다. 봉래가 위 글자들을 암각한 시기나 금수정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시등금수정기(始登金水亭記)>〔이상수(李象秀)「오당집(梧堂集)」권13〕에 의하면 봉래가 김씨(金氏)로부터 이 정자를 얻어 기거하다가 떠난 뒤에 다시 김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며, 또 속전(俗傳)에는 여기서 봉래가 기거할때는 이름도 봉래정(蓬萊亭)이라 불렀는데, 뒤에 김씨가 돌려 받으면서 금수정이라 고쳤다고도 한다. 그러나 각자시(刻字詩)에서 보면, 봉래가 이곳을 들러 당시 주인인 금옹(琴翁)과 더불어 금(琴)을 타고 음영(吟咏)하며 승경(勝景)을 즐긴 것으로 보여진다.
이곳뿐 아니라 속리산 문장대(文章臺)의 속칭 글바위의 ‘동천(洞天)’, 설악산 비선대(飛仙臺) 암반의 ‘비선대(飛仙臺)’, 두타산 무릉계곡(武陵溪谷)의 ‘두타동천(頭陀洞天)’ 등 암각이 모두 봉래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준암 아래로 영평천을 따라 2리쯤 내려가면 역시 영평팔경(永平八景)의 하나인 창옥병(蒼玉屛)이 있다. 이곳에는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모신 옥병서원(玉屛書院)이 있고 만년에 사암의 독서처였다는 이양정(二養亭) 터가 있는데 그 천변(川邊) 암벽에 한호(韓濩)의 글씨 6~7개와 사암의 시가 새겨져 있어, 금수정의 암각과 더불어 일대 각자군을 이루고 있다.

                                                                                                    해설 : 오세옥(본회 전문위원)
                                                                                                    탁본 : 서정문(본회 전문위원)
                                                                                                    안  정(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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