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52 ---1200년대 후반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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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8 09:34 조회1,567회 댓글0건본문
■ 1200년대 후반 역사인식
나라의 주체가 무너지고 주권이 흔들릴 때에는 민족 자존과 자긍심을 일깨우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몽골의 침략 시기와 원나라 지배 시기에 역사책 편찬이 활발했던 것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편찬된 고려 후기 역사서들은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제왕운기 등이 있다.
삼국사기의 역사 인식에 정면으로 반발했던 사람은 ★이규보(1168-1241)였다. 그는 <동명왕편>을 지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건국 설화를 소홀하게 다룬 사실을 정면으로 지적하였다.
실로 이규보는 몽골 침략을 염두에 두고 당시 널리 읽히는 관찬 역사책인 <삼국사기>가 자주성을 강조하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그는 고구려의 강한 민족정신을 계승하여 국난을 타개하는 시대정신을 함양시키겠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원 지배하에 있을 때 승려 ★일연(1206∼1289)에 의해 <삼국유사>가 출간되었다. 일연은 당시 불교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승려였다. 그는 운수행각 중에 고통에 빠져 있던 민중에서 삶의 희망을 주기 위해 전국을 떠돌면서 보고 겪은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묶고자 하였다.
<삼국유사>에 이어 ★이승휴(1224-1300)에 의해 <제왕운기>가 완성되었다. 그는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는 올곧은 선비로, 조정의 폐정을 시정하려다가 걸핏하면 쫓겨났다. 개성이 강한 지성인이었고 개혁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행동파였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좌절되자 산속에 묻혀 불경을 읽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운문체로 엮은 책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요하 동쪽 땅에 따로 한 천지가 있으니 뚜렷이 중국과 구획을 지어 나누어져 있도다. 큰 파도 만경에 걸쳐 삼면을 에워싸고 북쪽에 육지가 줄처럼 이어져 있네. 가운데 땅덩이 천 리가 바로 조선이니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 그 이름 천하에 퍼졌구려."
그는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을 먼저 설명했고, 중국과 구분되는 당당한 자주 독립국임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그는 중국책을 참고하여 <삼국사기>에서 빼버렸던 단군, 위만, 발해를 역사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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