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53 ---1281년경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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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8 09:40 조회1,559회 댓글0건본문
일연(1206-1289)은 가진선문이면서도 목우자 지눌의 선풍을 계승하였고, 원종 충렬왕 등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일연의 수제자 혼구는 충렬공 김방경과 함께 1296년경 원나라에 들어가(?또는 서신으로) 몽산덕이의 가르침을 청하는 등 여러가지로 밀접하였으므로
1281년경 일연이 간행한 <삼국유사>를 많이 보았을 것이므로 소개하여 봅니다.
■ 야후 검색
일연 (一然 1206∼1289(희종 2∼충렬왕 15)
고려 후기 승려. 초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속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견명(見明). 장산(章山;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출신. 1214년(고종 1) 해양(지금의 光州)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여러 선문(禪門)을 방문·수행하였고, 27년 승과에 급제한 뒤 현풍(玄風)의 보당암(寶幢庵)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하였다.
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46년 다시 선사(禪師)를 더하였고, 49년 정안(鄭晏)의 청을 받고 남해의 정림사(定林社)로 옮겨와 이 절을 주재하며 대장경을 주조하던 중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작업에 참여하였다. 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무르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지었고, 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江華島)로 가서 선월사(禪月社) 주지가 되어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그 뒤 경상북도 영일(迎日)에 있는 오어사(吾魚社), 달성(達城) 인홍사(仁弘社;뒤에 仁興寺) 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폈고, 77년(충렬왕 3)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81년 몽고군의 일본원정 때, 왕을 따라 경주(慶州)에 머무르며 왕에게 법설을 강론하였고, 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그해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으며, 89년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한편 한국의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정리하고 향가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 5권)》를 지었는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밖의 저서로는 《화록(話錄)》 《게송잡저(偈頌雜著)》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등이 있다.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
■ 고려후기 조선초 불교사 연구 (2003, 황인규 혜안)
이렇듯 ★충지를 전후하여 수선사의 사주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사실이 없을 정도로 그 사세가 쇠락해 갈 때 선종계는 가지산문의 고승인 보각국사 ★일연이 등장하여 수선사 지눌의 유풍을 진작시켰던 것으로 여겨져 주목된다.
일연(1206-1289)은 1219년 14세에 가지산문의 설악산 진전사에서 대웅에게 득도하고 구족계를 받은 뒤 1246년(고종33)에 당시 재상이었던 ★정안의 초빙을 받아 세운 정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여기서 대장경판을 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1261년(원종2)에 왕의 부름을 받고 선월사에 머물면서 목우자의 법을 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일연이 ★혜심의 제자 ★몽여에게 [조동오위]를 증편하여 그에게 점검을 받았던 사실과 궤를 같이 한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산문이면서 사굴산문인 지눌의 법을 계승했다는 것은 두 산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지눌의 선교융화적이며 포용적 노력의 한 사례라 생각된다.
한편 유생들에게도 지눌의 선풍이 유통된 사례가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에서 찾아지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번 보내준 양측의 법어를 항상 牧牛子私記 위에 놓아두고 서로 바꿔 가며 보면서 보고 음미하여 싫어함이 없었으나 근기가 낮고 용렬해서 아득히 내 코를 찾아도 이해가 닿지 않았습니다. <전 중봉대부 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판사 세자사로 치사한 상락군개국공 식읍일천호 식실삼백호 ★金方慶이 滿月峯 了了庵 信和尙에게 답한 글> [동안거사집] 잡저 일부
일연은 임제종뿐만 아니라 조동종이나 우리나라의 고유의 민간신앙을 존중하는 등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고자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선풍이 그의 제자인 ★혼구에게 이르러서는 몽산의 선풍까지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296년) 겨울에 고려의 萬壽上人이 와서 말하기를 고려국 내원당 대선사 ★混丘, 靖寧院 公主 王氏 妙智, 明順院 公主 王氏 妙惠, 前都元帥 上洛公 ★金方慶, 侍中 韓康, 宰相 廉承益, --- 등 여러분이 재삼 편지를 보내서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法門景致>
*남권희, ‘필사본 제경촬요에 수록된 몽산 덕이와 고려인물들의 교류’ [도서관학논집]21, 1994
위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 만수상인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으나 그는 고려의 승속 10인을 재삼 몽산에게 전하고 가르침을 부탁하였던 인물이다. 그 승속인물 가운데 내원당의 대선사 ★혼구도 몽산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이렇듯 몽산의 선풍은 가지산문뿐만 아니라 다음 장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수선사와 수선사의 분원인 선원사에서 앞장서서 수용하였던 것이다.
■ 문화재청 홈
종 목 국보 306호
명 칭 삼국유사 (三國遺事)
분 류 목판본류
수 량 일괄
지정일 2003.02.03
소재지 서울 종로구 외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사유,국유
관리자 사유,서울대학교규장각
부속문화재 삼국유사<권3-5> (국보 306-1)
삼국유사<권1-5> (국보 306-2)
고려 충렬왕 7년(1281)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로, 5권 2책(권1∼5)이며, 목판본이다.
조선 초기본은 국보 제306-(1)호,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은 국보 제306-(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있다. 흥법편은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편은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한 내용, 신주편은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내용, 감통편은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내용, 피은편은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편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을 각각 수록하였다.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그 특징을 보면 첫째,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 등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되며 14수의 향가는 우리 나라 고대문학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세째,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탑상편의 기사는 탑·불상·사원건축 등에 그리고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네째,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종교적이고 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으며, 『삼국사기』 화랑관계 기사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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