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산사 복원 만취당 위패 봉안식 (9/19 일요일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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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4-09-18 11:07 조회1,439회 댓글0건본문
후산서원 내 후산사 복원 만취당 위패 봉안식
- 일시 : 9.19 (일요일) 아침 10시
- 장소 :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 내용 : 만취당(휘 사원) 선조님 위패 봉안
- 참석예정 : 의성, 대구는 물론 멀리 대구, 서울, 대종회에서도 많은 일가님 참석 예정
★참석 가능하신 안사연 일가님 연락 주세요. 010-6742-8000 김정중
저는 오늘 직장 산악회 따라 충북 단양에 와 있습니다.
현재 사인암을 지나고 있고 구인사까지 갔다가
저녁에 대구로 내려가서
내일 아침 서둘러 의성으로 갈 예정입니다.
대구나 의성으로 오실 분 미리 연락주시면
푸짐하게 추억거리를 만들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많이 참석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충북 단양에서, 김 정 중 배상
김사원(金士元) (1539~1601)
광수의 증손으로 호가 만취당 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월란정사에서 수업 하였으며 덕량이 심후 했다
임란에 창의 하여 정재장이 되었으며
난후에는 휼민을 구휼하여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알려졌다
사후에 후산정사에 제향하였으며
실기가 전한다
당시 지은 만취당이 현존한다
■ 디지털한국학
김사원(金士元)
1539(중종 34)∼1602(선조 3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 경상도 의성·점곡(點谷)·사촌(沙村)에 살았다. 증조부는 일사(逸士) 광수(光粹)이다.
1560년(명종 15) 이황(李滉)에게 나가 음양오행설을 배웠다.
천성이 인자하여 개인의 재산을 털어 많은 기민(飢民)을 진휼하여 지방민의 추앙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인 정제장(整濟將)으로 추대되었다. 후산사(后山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義城邑誌, 典故大方. 〈張東翼〉
■ 의성군지(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
김사원(金士元 1539∼1601)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 연산조에 이름난 선비 송은 ★김광수의
증손이다. 부호군의 벼슬을 지냈으며 퇴계의 고제로서 도산구곡(陶山九曲) 중의
제2곡으로 알려진 월란정사(月瀾精舍)는 그가 강학하던 곳으로 지금도 후학들이
보존 관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성 정제장으로 활약하여 공훈을 세
운 바 있으며 천성이 후덕하고 돈독하여 원근에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사친에
효도를 다하고 기민을 구휼함에 전곡(錢穀)을 아끼지 않아 사람들이 공의 집을
김씨 의창(義倉)이라 일컬었다. 그 외에도 남을 구휼한 사례가 많아 오늘날까지
일화로 전함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후에 공의 덕망을 추모하여 후산사(後山祠)
에 제향했다.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이 행장을 짓고 번암 ★채제공(樊岩 蔡濟恭)
이 묘갈을 썼다. 그의 독후한 천성의 여음으로 후손이 번창하고 문맥이 연면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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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장손 ★김상원(金尙瑗)은 호를 남애(南厓)라 하고 어려서는 수암 ★유질(修岩 柳 )에게, 장성한 뒤에는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사가 뛰어났다. 병자(丙子) 강화 후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자수 강학하여 세인이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부르고 효우도 출중했다. 호군을 지내고 유고가 전하며
다음 손자 ★상기(尙琦)는 호를 사오(沙塢)라 했으며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고 문행이 뛰어나 당사의 명사와 교우가 빈번하고 유집이 전하며,
자여당 ★상각(自餘堂 尙珏)은 천성이 관후하고 효우가 극진하여 향리에 널리 알려졌고,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여 사촌에 자여당(自餘堂)을 창건 관리하며,
다음 손자 ★상인(尙璘) 또한 가학을 이어 받아 문장이 훌륭하고, 특히 숭조와 교손에 더욱 힘써 일향의 추앙을 받고, 만년에 양진당(養眞堂)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며 여생을 보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의 증직을 받았다.
현손대에 이달(履達), ★이규(履規)는 모두 문행이 있어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집도 전하며,
증손 ★성좌(聖佐)는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을 사사하여 문행이 높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고 청백리로 추앙받았다.
★도응(道應)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회인 현감(縣監)을 지냈다.
★양좌(良佐), ★추응(秋應) 등 모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되고 문적이 남았으며,
소암 ★재응(素巖 載應)은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에게 배우고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구사당 ★김락행(九思堂 金樂行) 등과 친교가 있었으며, 유집과 사례집사(四禮輯辭)가 전한다.
6세손 이하에 와서 ★종구(宗九)는 호를 운암(云庵)이라 했고 문과에 급제 전적(典籍)을 역임했으며,
★성응(誠應), ★양직(養直), ★청진(淸進), ★성진(誠進)은 모두가 족친인 천사 ★김종덕에게 학문을 닦아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고 명망이 원근에 알려졌다.
★양휴(養休)는 호를 율원(栗園)이라 하고 ★천사(川沙)와 후산 ★이종수(后山 李宗洙),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에게 수학하여 경사에 밝았고 후학을 장진한 공이 있으며, 유집 5권이 전한다.
이어서 ★양경(養絅)은 진사이었으며 서고 ★우유(西皐 佑裕)는 경사에 밝고 후덕했으며,
사촌 ★희유(思村 羲裕)는 대과를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냈고,
기산 ★석유(奇山 奭裕)는 정제 ★유치명의 고제로서 후진 양성에 힘써 당세에 공헌했으며,
★수익(壽翼), ★상호(相鎬), ★호직(浩直) 등은 한말에 진사에 합격되었다.
운산 ★상종(云山 象鍾)은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의도가 준정하고 기우가 광심했으며, 1896년 병신년에 창의하여 의성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되고, 금성면 산운(山雲)과 옥산면 황산(黃山)에서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린 바 있다. 후에 파병조칙에 의거 융복을 거두고 61세로 서거했으며 독립유공자로 추서를 받았다. 좌산
★수욱(左山 壽旭)은 소모장(召募將), ★권대직(權大稷)은 중군(中軍), ★수담(壽聃)은 선봉장(先鋒將), ★수협(壽莢)은 관향장(管餉將)으로 의성 의병을 주도한 바 있다.
■ 퇴계문하 6哲의 삶과 사상 (1999,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간재 이덕홍,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지산 조호익
83. 金士元
생몰년-1539∼1601
호-晩翠堂
거주-義城
문집명-晩翠堂實記
문인록소재 사승관계-경신년(22세)에 拜謁, 質疑, 居喪함
개인문집소재 사승관계-경신년에 퇴계를 도산에서 배알하고 수업을 청함, 퇴계의 죽음에 3년 동안 거상, 퇴계에게 왕래 수학한 기간이 10년이나 지속됨. (行狀 李象靖 撰)
***만취당선조실기 상,하
***만취당선조실기 전 (중간본)
■ 퇴계문인록 (1983, 이희대 편저, 제자 서봉 김사달)
p132
晩翠堂 金士元
김사원의 자는 景仁이고 호는 晩翠堂(만치당)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중종33년(1539년) 의성에서 출생하여 퇴계선생에게 薰陶(훈도)를 받은 후 덕행을 실천한 선비였다.
천성이 인자하고 어릴때부터 공부를 즐겨하였던 만취당은 20세가 지난후에 퇴계선생 문하에 들어가 훈학을 받았으며 이때 선생은 武夷 觀善齋(무이 관선재)에 간한 시를 써 주면서 면학을 장려하였다.
도산에서 훈학을 받던중 산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병이 위중하게 되자 선생이 경계하기를 "古人들이 학문을 하는데 비록 勤苦(근고)했다고 하지만 어찌 生病을 얻어 부모의 근심을 끼치는데 이르러서야 되겠느냐" 고 하여, 건강을 돌보면서 공부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영남의 선비들이 의병에 가담하여 왜적과 싸울 때 의성 齋整將(?整齋將)에 추대되어 의병대장 金垓(김해-의성김씨 김효로의 ?현손)를 도우면서 활약했던 그는 전란통에 굶주리는 지방민들에게 자기집 곡식과 음식물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난리가 평정된후 도움받은 사람들이 토지와 물건을 가져와 사례하는 것 조차 거절한 덕망있는 선비였다.
학문을 닦으면서 농사일에도 힘써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으로 구제한 적도 있으며 이러한 선행에 대하여 이 지방 사람들은 "金氏義倉"(김씨의창)이라고 불렀다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일생동안 관직을 멀리 하고 학문과 영농에만 힘쓴 만취당은 일찍이 "선비가 처세하는데 義아닌 것으로 祿을 받지 말 것이오 오직 본분에 진력하면 거의 허물이 없을 것이며 언행을 삼가는 한편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 農桑(농상)에 힘쓰는 등 세가지 일을 스승의 가르침대로 수행할 것이다." 고 말했다고 번암 채제공이 지은 墓碣에 적혀 있다.
還故 후 고향에 月瀾精舍(월란정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하다가 1601년(선조34년)에 서거하니 향년이 63세였으며 의성 后山祠(후산사)에 입향되었다.
작성자 :김정중 작성일 : 2002/05/09 01:20 (from:168.249.136.73) 조회 : 107
■ 월란정사(月瀾精舍)와 나의 추억
월란정사(月瀾精舍)
임란공신
만취당<<선조께서
22歲 되시던 1560년(명종 庚申)에
퇴계선생께 청업(請業)하고 십여년간 수학하시던 곳이며
도산 2곡(陶山二曲)으로 경계(景界)가 절승(絶勝)임>>
(위는 만취당 실기에 사진과 함께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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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문중의
안동도산 소재 유일한 정자
이젠 안동댐 수몰지역으로
배를 타고 갈수있는곳
일찌기 퇴도 선생께서
수제자 사원(만취당 김사원)선생께
정자자리 하나를
유일하게
내어주신곳
이곳에서 문답하시고
지으신 詩가 여러 수 만취당 실기에 전한다
진성이씨 퇴계후손분 들과
안동김 사촌 종중과
윤번제로 유사 맡아
400여년 동안 학술회의 개최 하신곳
내 어릴적 월란정 모임에 문중 대표로 가신다며
자랑스레 맘 설레시던
조부님 부주님!
거길 따라 간적 있는 철부지 나
월란정 가시는 사촌 손님이라며
업어 건네 주시던
중시리하던 아저씨도 이제는 이세상 분이 아니실거야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않는고... 의
그유수(流水)를
그런 저런 일들로
얼마나 많은 양반님네 들 업어 건너 주셨을꼬
나룻배 저어 가기 보다 업어줌이 간편 했을터
경상도 말로 어버라(업어라)
한마디에 잠뱅이 둥둥 걷고...
***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의
월란정사 풍광이
댐의 물과 더불어 더욱 절경이리라
퇴계후손 문중과 공동 관리하지만
안동김씨 사촌문중의 재산
송이버섯도 많이 나지요
그토록
아담하고 단아한 정자
정겨운 토담
반겨주던 대문칸
영남학파 계승하며 지켜온 토계 온혜 부포 섬촌 사촌 양반님네들
모임과 정자와 두 문중
세월속에 빛 바랬는지
어른님들 그 이상의 얘기는 모릅니다 가르쳐 주세요
***
꼭 촬영 후 이 홈에 올려야지
여름 안사연 행사시 꼭 찾아봐야지
문헌도 많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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