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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54 ---1287년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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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8 09:46 조회1,4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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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1224-1300)의 일생의 행적과 그의 문집 <동안거사집>을 보면, 이승휴는 충렬공(김방경, 1212-1300) 보다 12살 연하이지만, 특히 만년의 행적이나 청렴 강직한 성품이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1280년 충렬왕의 측근세력과 대립한 점, 이후 삼척 두타산 아래 은거하면서 1287년 제왕운기를 저술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우월성을 확립하고, 居士로서 불교에 탐닉하면서 충렬공과 친밀히 교유한 점,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펼칠때 특별히 기용된 점을 보면 충렬공과 이승휴는 거의 같은 행로를 밟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1287년 이승휴가 간행한 제왕운기를 충렬공께서도 많이 보았을 것이므로 소개하여 봅니다.



■ 디지털한국학

이승휴(李承休)
1224(고종 11)~1300(충렬왕 26). 고려의 문신.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利縣)사람으로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12세에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신서(申#서41)에게서 《좌전 左傳》과 《주역 周易》 등을 익혔으며,  

125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현(三陟縣)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그곳 두타산 구동(頭陀山龜洞)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3년(원종 4)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지어 보내고,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에 보임되었다.

1270년 삼별초가 봉기하였을 때에는 군수(軍需)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極論)하였으며,  

1273년에는 식목록사(式目錄事)로 있으면서 당시 공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에 초배(超拜)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초안하였다가 오히려 파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공으로 잡직령 겸 도병마녹사(雜職令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하여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사행(使行)하였는데,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하도록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어서는 장리(贓吏)7명을 탄핵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가 원한을 사게 되어 곧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는데, 이때부터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얼마 뒤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임명되었으나 1280년(충렬왕 6)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당호(堂號)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 歸去來辭〉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고, 여기서 《제왕운기》와 《내전록 內典錄》을 저술하였다.

또한, 만년에는 불교에 몰입하여 용안당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치고 토지를 희사하기도 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左諫議大夫史館修撰官知制誥)에 임명되었으며, 곧 사림시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대부(詞林侍讀學士試#비58書監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시사 숭문관학사(同簽資政院事判#비58書寺事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하였고, 결국 같은해에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였다.

저작으로서 《제왕운기》가 있고,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한 문집 《동안거사집 東安居士集》이 전하여지고 있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로서, 이승휴를 비롯한 당대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는 속에서 민족문화의 우월성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자주적인 역사서라는 것에서부터, 유교사관을 내세워 원나라에 대한 사대를 합리화하는 사대적·비자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中期의 民族敍事詩―東明王篇과 帝王韻紀의 硏究―(李佑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7, 1962;韓國의 歷史認識 上, 創作과 批評社, 1976)
蒙古壓制下의 高麗史學의 動向(金哲埈, 考古美術 129·130合號, 1976)
李承休의 生涯와 歷史認識―帝王韻紀를 中心으로―(劉璟娥,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李益柱〉
  
조충---조계순---조변---딸+유자우---딸+이임종(이승휴 아들)
김방경---딸+조변
*김방경의 외손녀(조변 딸) 사위 유자우는 이승휴의 사돈



■ 이승휴(李承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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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는 충렬왕6년(1280) 그의 나이 57세에 전중시사로서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충렬왕의 失政과 附元세력가들의 횡포를 비판한 10事를 上疏했다가, 다시 파직되어 삼척 두타산으로 돌아온 후 佛經을 10년 넘게 耽讀하였다.  
이때에 서장관으로 있었을 때 지은 詩와 日記 등을 모아 [賓王錄]이라 했으며, 그가 거처하는 堂號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容安堂 이라 했다.
이승휴는 [빈왕록] 저술로 시작하여, 64세에 [帝王韻紀], [內典錄]을, 66세에 [보광정기]를, 71세에 [간장사기], [제왕운기] 初刊을 이룩하였다.  



  
■ 제왕운기 (帝王韻紀)  
1287년(충렬왕 13) 문인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역사시(歷史詩).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함께 고려시대에 찬술한 3대사서(三代史書)의 하나로 상·하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에서는 중국의 반고(盤古)로부터 금(金)까지의 역사를 7언시로 노래했다. 하권에서는 한국사를 2부로 나누어, 제 1 부에서는 동국군왕 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라 하여 지리기(地理記) 및 상고사(上古史)를 1460구절의 7언시로 읊었으며, 제 2 부에서는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라 하여 고려 태조로부터 충렬왕대까지의 사실(史實)을 700구절의 5언시로 엮은 것이다. 특히 하권에 실려 있는 단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함께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뒤 1360년(공민왕 9), 1413년(태종 13)에 각각 중간(重刊)되었는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중요한 판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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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원나라의 정치적·문화적 지배체제를 극복하고자 저술된 이 책은,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중국과 다른 민족문화적 주체성을 표명하였다. 이는 난세극복의 의지를 표명함에 있어 역사에 그 가치기준을 두고 저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학사적 측면에서 볼 때 단군기원의 역사의식 환기와, 몽고 간섭하에서 싹튼 민족의식과 함께 상고사를 한국사에 편입시켜 다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인쇄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문화재청
  
1 보물 418 제왕운기<상,하권>(帝王韻紀<上,下卷>) 서울 종로구 (소유자 곽영대)
2 보물 895 제왕운기(帝王韻紀) 서울 중구 동국대학교도서관 (소유자 동국대학교)
3 보물 1091 제왕운기(帝王韻紀) 서울 종로구 삼성출판박물관 (소유자 김종규)

문화재명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의 문인(文人)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중국(中國) 역사(歷史)와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를 운문(韻文)으로 적은 책으로 상(上) ·하(下) 2권이며 상권(上卷)은 중국역사(中國歷史)를, 하권(下卷)은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를 서술(서述)하고 주기(註記)를 붙였다.  

중국(中國) 역사(歷史)인 상권(上卷)은 2,330언(言)의 7언시(言詩)로 서술(서述)하였고,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인 하권(下卷)은 1 ·2부(部)로 나누었는데 제 1부(部)에는 ‘동국군왕개국년대(東國君王開國年代) ’라 하여 먼저 지리기(地理記)를 적고 다음에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후조선(後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 ·삼한(三韓)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부여(扶餘) ·후고구려(後高句麗) ·백제(百濟) ·후백제(後百濟) ·발해(渤海)를 1,460언(言)의 7언시(言詩)로 기술(記述)하고, 제 2부(部)는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 ’라 하여 700언(言)의 5언시(言詩)로 고려초(高麗初)부터 충렬왕(忠烈王) 때까지를 기술하였다.  

이 책은 권수(卷首)에 지원이십사년(至元二十四年)(충렬왕(忠烈王)13, 1287) 3월(月)에 쓴 저자(著者) 이승휴(李承休)의 서(序)가 있고 권말(卷末)에 양온령(良온令) 정소(鄭소)의 발(跋), 부사(副使) 이원(李源), 안염사(按廉使) 안극인(安克仁)의 후제(後題)가 있으며 그 뒤에 ‘지정이십년경자(至正二十年庚子)(공민왕(恭愍王)9, 1360) 5월(五月) 일(日) 동경개판(東京開板)…… ’이란 간기(刊記)가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원정년간(元貞年間)(1295∼1296)에 진주부사(晋州副使) 이원(李源)이 왕명(王命)으로 진주목(晋州牧)에서 개판(開板)하였고, 공민왕(恭愍王)9년(年)(1360) 5월(月)에 경상도안염사(慶尙道按廉使) 안극인(安克仁)이 경주(慶州)에서 중간(重刊)하였는데 글씨는 김희(金禧)가 썼다. 이 책은 경주판(慶州板)이기는 하나 후쇄본(後刷本)인 여말(麗末) 선초(鮮初)에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그뒤 태종 7년(1417)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지강(李之剛),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승간(李承幹) 등의 주관으로 경주(慶州)에서 3판이 나왔다.  

이 여말각본(麗末刻本)의「제왕운기(帝王韻紀)」는 보물(寶物) 제(第)418호(號)로 이미 지정된 바가 있거니와, 본서(本書)는 권수(卷首)(표(表)) 1장이 결락(缺落)되고 하권(下卷) 제 6장이 결락(缺落)되었으며 동(同) 제 8장은 타판본(他板本)이 보입(補入)된 것이기는 하나, 여말선초(麗末鮮初) 간본(刊本)으로 기왕(旣往)에 발견(發見)된 것과 대비(對比)할 수 있는 자료란 점에서 서지학(書誌學)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이며 역사학(歷史學) ·한문학(漢文學) 연구(硏究)의 자료(資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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