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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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09-18 22:38 조회2,143회 댓글0건본문
<2004년도 강진시제 참예보고>
◈ 일 시 : 2004년 5월 3일(월)~4일(화)
◈ 시제일 : 2004년 5월 4일(음 3월 16일)
◈ 장 소 : 전남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 남산
◈ 참석자(무순, 존칭 생략)
► 문온공파 대표 - 영환(문온공파 총무이사)
► 안 사 연 - 윤만(會항), 발용(會항), 정중(植항), 윤식
◈ 일 정
► 5월 3일 : 서울 → 남원 용장서원 → 군동 내동마을 재실 → 마량포구
► 5월 4일 : 마량포구 → 군동 내동마을 재실 → 부사공(휘 季老) 묘소 → 대호군공(휘 儒) 묘소 → 선운사 → 서울
※ 지루하실 것 같아 2회로 나누어 보고드리겠습니다.
▣ 5월 3일(월요일)
◈ 07:00 서울 잠실 출발 → 남원 向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잠실 롯데호텔 앞은 차량들로 가득 찼습니다. 게다가 빗방울이 오락가락 한 탓에 시제 걱정이 앞섭니다. 내일은 맑게 개기를 빌면서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08:10분경 정중 종친께서 약속대로 대구에서 출발, 남원으로 향하고 있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윤만 종친께서는 회사일로 오후 2시쯤 출발하여 강진에서 합류하기로 하였습니다.
남원으로 가는 도중 하늘이 벗겨지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이대로 날이 갰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남원시 경계로 들어서니 다시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제법 빗방울이 굵었습니다.
남원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예정보다 30분 가량 늦은 시각이었습니다. 진도까지 긴 여정이라 다소 무리하게 일정을 짰더니 출발부터 시간이 빡빡합니다.
정중 종친께서는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 일행이 출출할 것을 생각해 바람떡을 잔뜩 사 들고 계셨습니다. 떡 빚은 솜씨도 솜씨려니와 정중 종친의 정성스런 마음에 참 꿀맛이었습니다.
◈ 남원 → 용장서원
이제 용장서원으로 향합니다. 이곳(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상동마을)에는 문온공(휘 九容 : 문온공파 파조) 할아버지께서 배향되신 서원입니다. 물계서원이 퇴락하여 아직 복원되지 못한 까닭에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문온공을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남원 시내에는 용장서원에 대한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남원시청 문화재 담당 직원과 두어 차례 전화통화를 하고도 서너 번씩 길을 물어서 간신히 찾아들어갔습니다. 그것도 그냥 지나칠 뻔한 것을 영환 종친께서 솟을삼문이 범상치 않다는 말씀에 고생을 한층 덜었습니다.
용장서원으로 들어가니 인기척이 없습니다. 서원 주위를 살펴봐도 사람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뒤편 숭덕사(崇德祠)로 올라가 향을 사르고 할아버지께 큰절을 올립니다.
숭덕사는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며, 현판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합니다. 숭덕사에는 서쪽부터 <병부낭중 돈암 양선생(兵部郞中 遯菴 梁先生 : 梁能讓)>, <용성군 삼강 양선생(龍城君 三江 梁先生 : 梁朱雲)>, <문경공 척약재 김선생(文敬公 惕若齋 金先生 : 金九容)>, <문장공 청계 양선생(忠壯公 淸溪 梁先生 : 梁大樸)>께서 모셔져 있습니다.
용장서원에 관한 자료는 영환 종친께서 우리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신 자료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네 분께 인사를 올리고 나오니 그제야 인기척이 납니다. 숭덕사 앞의 경의당(敬義堂) 원장실로 들어가 맞절로 양씨 문중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동김가라 말씀드리니 환하게 반색이십니다.
마침 모레(음력 3월 17일)가 시향을 올리는 날이라 제수 준비차 시내에 나가셨다 막 돌아오신 참이시랍니다. 배향되신 네 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새롭게 배우는 내용이 많습니다.
영환 종친께서 미리 준비한 척약재 할아버지에 대한 책자 <범급(帆急)>과 약소하나마 향촉대를 드리고, 척약재 할아버지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 아니라 ‘문온공(文溫公)’이신 내용을 말씀드립니다.
남원양씨 남원양씨 용만공대종회(龍巒公大宗會) 양타(梁柁) 회장께서는 <무극집(無極集)>과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를 답례로 주십니다. 양 문중 할아버지 문집을 예물로 교환하니 더욱 뜻깊은 날입니다. 양타 회장께서는 문온공의 대표작인 한시 <범급>을 주욱 읽으시고는 이내 우리말로 풀이를 하면서 음미하십니다.(정말 부러웠습니다.)
현재 용장서원 관계 일은 우리 문중에서는 김제에 사시는 두식 종친께서 맡고 계시다고 합니다. 문온공파종회 총무이사를 맡고 계신 영환 종친께서는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문제를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경의당은 정면 4칸×측면 1.5칸의 팔작지붕집인데 주춧돌을 호박처럼 둥글게 다듬은 것이 특이합니다. 현판은 숭덕사 현판과 마찬가지로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것입니다.
경의당 좌우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었을 터인데, 현재는 서재만 남아 있습니다. 정면 4칸×측면 1.5칸의 팔작지붕집이나 경의당보다는 규모가 조금 작습니다. 마당에는 <용장서원기적비(龍章書院記蹟碑)>가 서 있는데, 비문에도 ‘문온공’이 아니라 ‘문경공’이라 적혀 있습니다.
비문을 대한 채 다시 긴 정담이 이어집니다. 영환 종친께서 비문을 죽죽 읽어 나가며 관계되는 일들을 말씀드리자 양타 회장께서도 감탄하신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한문을 잘 아는 분들이 오셔서 반갑소.” 하시며 얼굴이 더욱 밝아지십니다.
아쉽게도 이제 길을 재촉해야 할 시간입니다. 어느덧 12:20분이 되었습니다. 솟을삼문 앞에서 양타 회장을 비롯해 충장공파 종손 양진환 선생 등 남원양씨 어르신 네 분과 우리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고 아쉬운 이별을 나눕니다. 마당 앞까지 배웅을 나오신 남원양씨 어르신들께서는 “안동김문의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점심이라도 들고 가시오.” 하며 발걸음을 쉬이 놓아주지 않으십니다.
양타 회장께서 말씀 끝에 “서원 운영에 보태라고 안동김문에서는 밭 서마지기를 들여놓았네.” 하시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 용장서원 가는 길
남원 시외버스터미널(10:30분) → 첫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 → 도로 표지판을 따라 주생면 방향으로 계속 직진 → 약 20분간 주행 후 오른쪽 길가에 자그마한 ‘상동마을’ 표석을 보고 우회전 → 마을길을 따라 직진(상동교회가 비교적 눈에 띄는 건물임.) → 방음벽을 세운 육교 형태의 전라선 철로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상동수퍼, 왼쪽에 상동마을회관(왼쪽에 한 길 정도의 돌표석이 있으나 눈에 잘 띄지 않음) → 10여M 왼쪽 골목길 → 차량 서너 대 주차할 수 있는 마당 → 용장서원
(초행길이라 자세히 설명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용장서원 → 강진
다시 나주 시내로 들어가 대호군공(大護軍公 諱 儒)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합니다. 용장서원에서 정담을 나누는 사이 하늘이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강진으로 향하는 도중 발용 종친께서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소가 나주에 있으니 그곳을 찾아뵙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하십니다. 우리 일행은 웬만큼 오는 비는 맞기로 결정하고 영환 종친께서 대종회 사무국장(관묵)께 전화로 대호군공파 회장님 연락처를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사무총장께서 다시 전화를 주시고, 함평의 상회 종친, 보성의 태식 종친 등 대호군공파 종친들과 숨가쁘게 전화가 오고갑니다.
아쉽게도 대호군공 할아버지 시제가 일요일인 어제(양력 5월 1일, 음력 3월 14일)였답니다. 대호군공 종친들께서는 전남 함평, 보성 등지에 주로 거주하시기 때문에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역은 나주 금천농협 이사이신 박민찬 씨께서 관리하고 계십니다. (연락처 박민찬 씨 - 금천면 죽촌2구 상촌마을 010-8331-7420)
나주 시내로 들어서니 장대비가 떨어집니다. 금천농협을 통해 박민찬 씨 연락처를 알아내 수차례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들일을 나가서 댁에는 사람이 없었고, 핸드폰이 바뀌어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예정지인 부사공(휘 季老) 할아버지 묘소를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강진의 재이 종친께서 마중을 나오시겠답니다. 송구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부사공께서는 군사공의 손자로서 계보는 다음과 같으며, 발용 종친의 18대조이십니다.
▲군사공(휘 七陽) → 3子 인수부윤공(휘 墩) → 외아들 부사공(휘 季老)
부사공 묘소는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에 계신 판서공(휘 愃) 할아버지 묘소에서 차량편으로 약 20분 거리입니다. 서둘러 강진으로 향합니다.
잘 닦인 도로를 달리니 기분이 상쾌합니다. 13:40분경 동광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습니다. 14:00시가 조금 넘어 윤만 종친께 연락을 취하니 방금 강진행 고속버스에 오르셨다고 합니다. 먼 길 심심하기도 하실 텐데……먼 길 무사히 합류하시기를 바라며 전화를 끊습니다.
광주를 빠져나오고서도 한참을 더 달려 14:40분이 되어서야 늦은 점심으로 허기를 달래고 15:00시 정각, 다시 강진으로 향합니다.
노곤한 기운에 깜빡 졸다 깨니 월남사 터 인근입니다(아침 일찍부터 운전대를 잡으신 발용 종친께 무척 송구스러웠습니다.). 지난 해 시제 때 답사한 곳이기는 하지만 상서공(휘 孝印) 할아버지 필적이 남아 있는 월남사 터를 다시 들르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일정이 빠듯해 올라오는 길에 일정을 잡아보기로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지난 해 시제 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2003년 강진 시향 참예길에 들른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이곳을 통과하면서 발용 종친께서 강진의 재이 종친께 전화를 드리니 비 때문에 어려울 것 같으니 내일 시제 후에 찾아뵙는 것이 좋겠다고 하십니다.
아닌 게 아니라 비구름이 웅장한 월출산을 온통 휘감았습니다. 장관이었습니다. 다행히 성긴 빗방울이 간간히 차창에 떨어집니다. 월출산은 한 폭의 동양화였습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 비경을 담는 사진작가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일정을 바꿔 군동면 내동마을의 군사공파 재실로 향했습니다. 시제에 참여하신 어르신들께 인사를 올리고 시제 전날 풍경을 종친 여러분께 전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내동마을에서 작천면 토마리 선영으로 넘어가는 고개 못미처에 동원그룹 재철 회장의 아버님(휘 敬默) 묘소가 있습니다. 비석이나 상석도 없이 산기슭에 단아하게 모셔진 묘소에는 잔디가 정성스레 덮여 있었습니다. 검소하면서도 기품 있는 산소를 보면서 여러 생각들이 스쳐갑니다.
내동마을 재실에 도착하니 저녁 16:45분이었습니다. 재실은 분주하면서도 왁자지껄 정겨운 소리가 연신 이어집니다.
재실로 들어가 군사공파 수인 회장과 재석 고문을 비롯해 여러 어르신들께 인사를 올리고, 재실 안팎을 둘러봅니다. 작년에 뵈었던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태영 종친의 아버님께서도 와 계셨습니다. 인사를 드리니 무척 반기십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이신 어르신들께서는 연로하신 데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으로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곳까지 오셨는데도, 젊은 종친들이 시제에 참석해 주어서 고마운 일이라며 손을 ‘꼬옥’ 잡으십니다.
◈ 내동마을 재실 → 마량포구
재실에서 다과를 조금 들고 해가 설핏해질 즈음 숙소로 정해 놓은 마량포구로 향했습니다. 18:00분경 재실을 나와 발용 종친께서 재이 종친께 연락을 드립니다. 작년에도 큰 신세를 졌건만 올해 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량포구로 가는 길은 유홍준 교수의 말마따나 ‘남도 답사 1번지’입니다. 기다란 산기슭을 따라 바다가 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지도를 놓고 보면 마치 ‘ㅅ’자 모양입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구불구불 따라가며 펼쳐지는 풍광은 사람 마음을 홀딱 빼앗습니다. 군데군데 ‘경치 좋은 곳’,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이제 그 아름다운 길을 따라 우리 일행은 저녁 어스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땅거미가 하늘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와 바다와 뭍을 검게 물들여가는 장관을 재주 부족한 제가 종친 여러분께 제대로 전해 드리지 못하는 것이 내내 아쉬울 뿐입니다.
마량포구로 들어서는 고개 바로 앞에 청자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근방이 재이 종친께서 사시는 마을입니다. 우리 일행이 막 고개를 넘어 대구면에 들어서자 재이 종친께서 곧바로 우리 차량 뒤로 따라붙습니다. 송구스럽게도 미리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재이 종친의 안내로 마량포구로 향했습니다. 예서 마량포구까지는 불과 3분 거리입니다. 까치발로 서서 고개를 길게 빼면 마량포구가 보일 것만 같은 곳입니다.
◈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바지락조개 국
재이 종친의 안내로 마량포구를 한 바퀴 돕니다. 밤바다가 제법 거셉니다. 음력 열닷새건만 날이 잔뜩 흐려 칠흑같은 어둠입니다.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로 향합니다. 바닷바람이 넥타이를 연줄처럼 말아 올립니다. 바로 앞의 섬을 연결하는 연륙교 공사가 얼마 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시원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시고 우리 일행은 식당으로 향합니다.
작년 환대가 너무 송구스러워 저녁 식대를 우리 일행이 내겠다고 하자 재이 종친께서는 극구 만류하십니다. “멀리서 오신 종친들께 약소하나마 이렇게라도 대접할 수 있는 것이 영광”이시라는 말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귀한 청자(靑瓷) 머그잔까지 선물로 내놓으십니다. 우리 일행은 작은 정표조차 마련하지 못했으니 더더욱 송구한 일이었습니다.
저녁을 맛있게 들고, 반주를 하는 사이에 윤만 종친께서 마량포구에 도착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녁 20:10분이 강진에서 마량으로 들어오는 막차시간인데, 날이 궂은 덕분에 막차가 늦게 들어와 간신히 그 차편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하십니다. 오시는 도중 고생이 크셨습니다.
부랴부랴 마중을 나갑니다. 허어, 낮선 길이라 어디쯤 계신지도 모르겠고, 포구 초입에서 소리쳐 불러 봅니다. 막차 시간에 맞추어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떠나는지 뱃고동에 윤만 종친을 부르는 소리가 묻혀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발용 종친께서는 PC방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간단한 현지 보고와 사진을 급히 전해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윤만 종친을 식당으로 안내하고 뒤따라 PC방으로 향합니다.
발용 종친께서는 미리 사진 올릴 장비를 준비해 오셨건만, 이곳 사정이 허락지 않습니다. 바닷가 마을의 구형 PC라 디지털 카메라를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컴퓨터의 달인이신 발용 종친께서 머리를 짜내 여러 방법으로 시도해 보았건만 사진을 올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밋밋한 현지 인사로 대신하고 식당으로 터덜터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식당에는 뜻밖의 귀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이 종친께서 그 늦은 시각에 댁에 계신 부인께 특별히 말씀을 하신 모양입니다.
공직 생활 틈틈이 자작으로 손수 지으신다는 바지락조개로 국을 끓여 오신 겁니다. 그 정성에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싱싱한 바지락조개로 끓인 국이기에 맛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각별한 정성이 그득히 들어 있기에 귀한 국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최남단에 와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바지락조개 국을 들면서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 감동을 종친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강진시제 참예보고 제1보를 마칩니다.
졸필인 탓에 숭조목족(崇祖睦族)에 최선을 다하시는 우리 선김 종친들의 높고 귀한 뜻을 제대로 전해 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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