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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도 강진시제 참예보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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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09-18 22:39 조회1,5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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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도 강진시제 참예보고(2)>
 

▲5월 4일 : 마량포구 → 군동 내동마을 재실 → 부사공(휘 季老) 묘소 → 대호군공(휘 儒) 묘소 → 선운사 → 서울


▣ 5월 4일(화요일)

◈ 마량포구 → 토마리 선영 → 내동마을 재실

새벽녘에야 눈을 붙였는데 다들 이른 시간에 눈을 떴습니다. 07:15분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동마을로 향합니다.

어제 하루 종일 일기가 나빠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자고 일어나니 화창한 봄날입니다. 모텔방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에는 티끌 하나 없고, 낮은 산꼭대기에 안긴 집들이 정겹습니다.

내동마을로 가는 길에 발용 종친의 안내로 청자자료박물관 인근의 푸조나무를 보러 갔습니다. ‘푸조나무’…… 처음 들어 보는 나무였습니다.

그렇게 잘생기고 장대한 나무도 드물 겁니다. 천연기념물 35호인 푸조나무의 위풍당당함이란! 강진에 다시 가면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 나무입니다. 푸조나무는 팽나무 4촌쯤 되는 나무로 생김새가 비슷하고, 키는 20m쯤까지 자라는데 소금기에 강해 바닷가 방풍림으로 제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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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35호 푸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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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이 종친이 사는 대구면 마을 전경. 고려청자 도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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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분경 강진에서 마량포구로 들어가는 꿈결같은 바닷가 도로가 시작되는 ‘남강식당’에 도착했습니다. 별다를 거 하나 없는 음식점이지만, 꼭 집에서 먹는 아침상 같아서 벌써 그 맛이 그리워집니다.

허기를 달래고 07:51분 음식점을 나와 내동마을에 도착하니 08:35분입니다. 내동마을은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앞에 너른 들이 길게 펼쳐진 곳입니다.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길에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庄碑)>가 서 있습니다.

1984년에 동원그룹 재철 회장께서 세우셨는데, 건립위원은 경묵, 영호, 사묵 종친 등 3분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에는 내동마을에 안동김씨가 들어와 살게 된 내력과 충렬공을 비롯한 선대 할아버지에 대한 계보가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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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동 마을입구의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庄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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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따르면, 내동마을의 입향조는 충순위공(忠順衛公 휘 hj019.jpg)이시랍니다. 충순위공께서는 중종 14년인 1519년에 태어나셨는데, 20세 되시던 봄에 성묘차 강진에 오셔서 머무르셨답니다.

이때 강진의 사족(士族) 해주인(海州人) 진사 오팽수(吳彭壽) 공께서 충순위공을 보시고는 사위로 삼으시고, 가전지(家田地)까지 나누어 주셨답니다.

그 후 충순위공께서는 충순위 벼슬을 지내신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선롱(先롱 : 선영) 남쪽인 군동면 내동(內洞)으로 이주하여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답니다.

충순위공의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군사공(휘 七陽) → 3子 인수부윤공(휘 墩) → 외아들 부사공(휘 季老) → 외아들 좌랑공(휘 石精) → 3子 충순위공(휘 廷健) → 외아들 충순위공(휘 hj019.jpg ) → 외아들 직장공(휘 興業)


잠시 재실을 들여다보고 토마리 남산(南山) 선영으로 향합니다. 남산 선영은 지난해 시제 보고에서 말씀드린 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작년만 해도 선영 입구에 별다른 이정표나 랜드마크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쉬웠는데 그 사이에 <토동마을>이라는 큼지막한 돌표석과 정자 형태로 지은 버스정류소가 생겼습니다.

<토동마을> 돌표석에서 좌회전하면 <능성구씨세장산>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돌표석이 서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죽 올라가다 우회전하면 남산 선영에 이르게 됩니다.

선영 오른쪽에 재실인 <영모당(永慕堂)>과 살림집이 있습니다만,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많이 퇴락했습니다. 영모당 왼쪽의 샘물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는데 빈집만 남아 마음이 아픕니다. 재실 안에는 영모당 건축과 전기공사에 참여했던 종친들 명단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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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과 살림집을 둘러보고 남산 선영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선영의 할아버지 설단과 묘소는 참 아늑해 보입니다. 낮은 구릉을 따라 판서공(휘 ) 할아버지 설단을 시작으로 대제학공(휘 承用) 할아버지 묘소, 평리공(휘 厚) 할아버지 묘소, 군사공(휘 七陽) 할아버지 묘소가 잘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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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 판서공(휘 ) 설단, 대제학공(휘 承用) 묘소, 평리공(휘 厚) 묘소, 군사공(휘 七陽)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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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공(휘 興業) 할아버지 묘소는 군사공 할아버지 묘소 아래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 10여m 올라가시면 됩니다.(남산 선영에 대한 내용은 지난해 시제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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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공(휘 興業) 묘소

남산 선영에 도착하니 불현듯 지난해 시제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유건과 도포를 입으신 어르신들, 정갈하게 준비한 제수, 그리고 시제 후 나무그늘에 둘러앉아 나누던 음복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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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밤 늦게 까지 내린 비로 인하여 묘제가 없었습니다. 작년 묘제 모습입니다.
 

하지만 올해 시향은 어제 쏟아진 비 때문에 부득이 내동마을에 있는 재실에서 모시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내동마을에 거주하시는 군사공파 종친들이 주관한 올해 시제에는 판서공(휘 ) 할아버지 후손 80여 명이 전국 각지에서 모이셨습니다. 그 때문에 내동마을 재실에는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어제처럼 날씨가 궂었다면 참 불편했을 텐데 할아버지 음덕으로 화창한 날을 맞이했나 봅니다.

올해 헌관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판서공

초헌관 洙寅(군사공파 회장)

아헌관 榮煥(문온공파)

종헌관 景默(군사공파)

▲대제학공

초헌관 在殷(군사공파)

아헌관 在哲(군사공파)

종헌관 遉中(도평의공파)

▲평리공

초헌관 相國(개성윤공파)

아헌관 昌植(개성윤공파)

종헌관 榮應(밀직사공파)

▲군사공

초헌관 昌會(군사공파)

아헌관 仁會(군사공파)

종헌관 元會(군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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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를 모신 뒤에 참석하신 종친들이 모두 재실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넓은 마당이 꽉 찼습니다. 지난해 기념사진이 다시 떠오릅니다.

제수는 제가 잘 모르는 데에다 ‘가가례’라 했듯이 강진 특유의 문화가 스며 있는 듯했습니다. 어물의 경우에는 병어, 농어, 전어 순서로 포개 얹었으며, 과일은 깍지 않고 그대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팥을 넣어 만든 떡을 사용하는데 ‘복두떡’이라 부른답니다. 맛이 참 좋습니다. 생김새는 다른 지방의 밀전병이나 부꾸미 비슷하기도 한데, 색깔은 흰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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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중요한 걸 깜빡할 뻔했습니다. 강진 시제에서는 방명록 외에 <남산시도기(南山時到記)>를 작성해 오고 있습니다. 줄여서 <도기>라고 부른답니다. 아마도 ‘남산 선영 시향에 참석한 종친들의 명단 기록’이라는 뜻 같은데, 맨 첫장이 1959년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도기를 작성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도기는 성명, 나이, 주소 등을 적게 돼 있는데, 이 도기에 적힌 명단을 보고 시제 전날 저녁에 파(派), 연령, 참석 횟수 등을 감안해서 헌관을 정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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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부터 기록된 도기로 강진시제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리고 내동마을 재실은 군사공파 종친께서 희사하신 건물로서 무후(無后)하신 까닭에 군사공파 재실로 내놓으셨는데 오래 전에 작고하셨답니다. 삼가 그 어른의 명복을 빕니다.


◈ 내동마을 재실 → 부사공(휘 季老) 묘소

음복과 간단한 요기를 한 다음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11:30분경 부사공 묘소로 출발했습니다. 부사공 묘소는 남산 선영에서 약 20분 거리인 황곡마을에 있습니다. 송구스럽게도 재이 종친의 안내로 황곡마을에 도착하니 11:55분입니다.

부사공 묘소 관리인 최도상 씨를 만난 다음 그 집 뒤울을 따라 부사공 묘소로 향합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울창한 대나무 숲입니다. 마치 밀림을 헤치고 나가는 기분입니다.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오솔길만 남기고 양쪽으로 까만 오죽(烏竹)이 빽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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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공 묘소 가는 길

부사공 묘소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깜짝 놀랐습니다. 묘소 크기가 거의 능(陵)만합니다. 일반 묘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봉분이었습니다.

재실에서 준비해 온 제주를 올리고 담양부사를 지내신 할아버지께 큰절을 합니다. 본래 부사공 유택은 민가가 있던 자리라고 재이 종친께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군사공파 집안에 전해 오는 구전으로는 이곳이 명당 터라 집주인에게 좋은 집과 후하게 값을 치르고 사들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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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휘 季老) 묘소

봉분 둘레는 40여 보에 달하는데 오래 된 문인석과 새로 세운 망주석이 각각 1쌍씩 배치돼 있습니다. 비석과 상석 역시 최근에 새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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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사공 묘소 제절에 해당하는 곳이 봉곳하게 솟아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원래 지형이 그렇게 생긴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봉분인 듯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듯합니다.  

영환 종친께서는 부사공과 동시대 묘소들에서 상하분 형태의 묘소가 있다고 들려주십니다. 이 문제는 현지에서는 풀 길이 없어 훗날 부사공 묘소를 참배하시는 종친들께서는 잊지 말고 참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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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공 할아버지 묘소옆의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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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 묘소 참배를 마친 다음 마을회관 앞으로 온 우리 일행은 재이 종친과 다시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올해 여름캠프 행사에 가능하면 참가하실 예정이라고 하시니 이 큰 신세를 그때는 꼭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려야겠습니다.

재이 종친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 길을 되짚어 나갑니다. 큰 고갯길을 구불구불 내려온 다음 영암으로 갈라지는 4거리에서 두 차량이 각기 다른 방향을 잡습니다. 재이 종친께서 차창 너머로 연신 손을 흔드십니다.


★부사공 묘소 찾아가는 길

내동마을 재실 → 남산 선영 → 상남 → 우회전 2차선 → 발천마을 → 병영농협주유소(주유소 맞은편에 병영성이 있음.) → 도로표지판(작진 작천, 좌회전 장흥, 우회전 병영)을 보고 <작천>으로 직진 → 산 위의 레이더 기지를 보면서 계속 직진 → 옴천사 → 옴천요양원 → 도로표지판 <광주>를 보면서 계속 직진 → 도로표지판 <황막>을 보고 우회전(갓길이 없는 2차선 도로) → 고개를 넘자마자 <황곡마을> 돌표석을 보고 좌회전(돌표석은 너무 작아 지나치기 쉬움. 바로 옆에 간이버스정류소 있음.) → 20여m 좁은 마을길로 들어서면 <황곡회관(마을회관)> 이곳 마당에 주차한 다음 황곡회관 오른쪽 고샅길을 따라 맨 위에 있는 집(부사공 묘소 관리인 최도상 씨)에 문의하시기 바람.

※부사공 묘소는 안내하는 사람 없이는 찾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관리인 최도상 씨를 찾아가시면 그 집 뒤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실 겁니다. 연락처는 군사공파 내동마을 종택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부사공 묘소에서 나오는 길

※위의 길안내는 강진 내동마을에서 부사공 묘소로 오는 길입니다.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서 오실 때에는 강진으로 들어가지 않고 광주에서 곧바로 부사공 묘소를 찾아가시게 되므로 참조하실 수 있도록 부사공 묘소에서 큰길로 나오는 이정표를 기록합니다.

부사공 묘소 아래 황곡회관(12:37분) → 20m쯤 가서 도로 → 우회전(버스정류소) → 작은고개를 넘어서 도로표지판(좌회전 장흥․병영, 우회전 영암)을 보고 영암으로 우회전(12:40) → 영복마을(버스정류소) → 저수지(12:43) → 큰 고갯길 구불구불 내려옴 → 4거리, 도로표지판을 보고 영암向 → 새로 난 길 → 청풍원 휴게소


◈ 부사공 묘소 → 대호군공(휘 儒) 묘역

시간이 빠듯해 아쉽지만 월남사 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역을 참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제 알아둔 연락처로 계속 전화를 합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관리인 박민찬 씨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역은 나주시 금천면 죽천2구 상촌마을입니다.(이곳 역시 지리를 잘 몰라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는 점을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주 중심지에서 광주 쪽으로 향하다가 금천면으로 방향을 잡은 다음 나주배연구소 안내판을 보고 우회전하니 바로 금천농협입니다.

인근 슈퍼에서 제주와 간단한 제수를 준비한 다음 금천농협으로 들어가 박민찬 씨 댁으로 찾아가는 약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별다른 랜드마크가 없어 조금 고생했습니다. 다행히 달리는 차에서 발용 종친께서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葬碑)>라 적힌 비석을 보고 이 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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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시 금천면의 대호군공파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葬碑)

산길을 몇 군데 확인한 다음 세장비와 마주 보고 있는 산 쪽으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길로 50m쯤 들어가 산모퉁이를 돌자마자 잘 단장된 묘역이었습니다.

묘역 앞에 차량 두어 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묘역으로 올라가 확인하니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역이었습니다. 잠시 후 관리인 박민찬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나주시 금천면 죽천리 옥현(玉峴) 선영입니다. 맨 위 대호군공(휘 儒) 할아버지를 비롯해 네 분 할아버지 묘소가 잘 단장돼 있습니다.

이곳에 영면해 계신 할아버지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호군공(휘 儒) → 사재시판사공(휘 彦龍) → 주부공(휘 汝) → 長子 참찬공(휘 世重)

묘역이 잘 단장돼 있는 데에다 구릉지를 따라 널찍널찍하게 묘소가 자리잡고 있어 활달한 기운이 넘칩니다. 봉분마다 비석과 문인석 망주석이 배치돼 있는데 특이하게도 혼유석 뒤에 반원형의 석물이 있어서 눈길을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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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군공(휘 儒)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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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시판사공(휘 彦龍)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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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공(휘 汝)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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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찬공(휘 世重)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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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호군공파 묘역 전경

준비해 온 제주와 제물을 올리고 큰절을 올립니다. 대호군공파 종친들께서는 주로 전남 함평과 보성 등지에 살고 계시고, 종인 수도 그리 많지 않아 늘 마음이 쓰이기도 합니다. 발용 종친께서는 항용 종친과 함께 제1회 여름캠프 직후에 전남 보성 등지로 탐방을 계속하셨는데 당시 보성에 살고 계신 대호군공파 태식 종친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멀리서 오신 종친을 대접하신다고 대호군공파 태식 종친께서는 진한 꿀물에 얼음을 띄워 내오셨는데 그 맛과 정성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태식 종친께서 손수 치신 양봉에서 얻은 꿀이니 여행길에 참으로 귀한 정성이었습니다.

대호군공 할아버지 비석에서부터 참찬공 할아버지 비석까지 차근차근 읽은 뒤에 조금 떨어져 계신 나주목사공(휘 守證) 묘소를 찾아갑니다.

목사공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찬공(휘 世重) → 3子 훈도공(휘 熏) → 長子 나주목사공(휘 守證)

나주목사공 묘소는 대호군공 묘역에서 인삼밭을 끼고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인삼밭 끝에 난 오솔길로 서너 발짝 올라서면 됩니다.

대호군공 묘역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는 모두 배위와 함께 모신 합봉인데, 나주목사공 묘소는 쌍분입니다. 석물 배치는 대호군공 묘역의 석물 배치와 같습니다. 하지만 오래 된 망주석이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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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목사공(휘 守證)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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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태가 흐르는 망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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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순을 먹어보며 동심에 젖어보는 참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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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절을 올리고 비문을 살펴본 다음 이제 서울로 향합니다.


★대호군공 묘역 찾아가는 길

나주 중심지 → 금천면 → 광주로 나가는 큰길을 따라 가다가 나주배연구소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 → 바로 금천농협 보임 → 도로를 따라 약4km 가서 3거리에서 우회전 → <신방>이라 적힌 버스정류소에서 좌회전(중앙분리선을 넘게 되므로 주의 요망) → 직진 → 은혜교회 앞에서 우회전 → 조금 가서 왼쪽 산모퉁이에 난 좁은 비포장도로로 진입 → 산모퉁이 돌자마자 대호군공 묘역

※은혜교회 앞에서 우회전한 다음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상촌마을 돌표석이 있습니다. 이 돌표석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葬碑)>가 나옵니다. 대호군공 묘역은 세장비 건너편 산입니다.


◈ 대호군공 묘역 → 선운사

14:37분 대호군공 묘역을 출발해 15:25분 광주시 농성역에서 정중 종친과 아쉬운 작별을 나눕니다. 이제 정중 종친께서 대구로 가셔야 하는 시각입니다.

나머지 일행은 15:25분 귀로에 선운사를 잠깐 들렀습니다. 추사 선생의 필적을 감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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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입구의 부도(浮屠) 밭에는 한국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고승들의 부도가 많은데, 그 가운데 조선 철종 9년(1858년)에 세운 백파 스님의 비석이 있습니다. 이 비석의 글씨가 바로 추사 선생의 친필입니다.

전면에는 “華嚴宗主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라 쓰여 있습니다. 뒷면의 비문에는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은 없으나 기운은 수미산을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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