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과 김재철의 <鍾路의 카페 巡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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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27 14:53 조회1,978회 댓글0건본문
■ [한 개의 돌이로다] (1971, ★이희승, 휘문출판사)
p.32
鍾路의 카페 巡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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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과를 다닐 때에 서울에는 카페라는 것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요새의 바아와 비슷한 것으로 술 따르는 여자가 있는 집이다. 원래 술은 한 잔만 먹어도 벌개지는 나는 이런 곳이 있는지 전연 몰랐다. 말하자면 숙맥이었다.
하루는 예과부장인 ★오다 라는 일본인 선생이 수신 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 "요새 경성에는 유혹물이 많으니 제군들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나는 이 말을 듣고 도대체 무엇을 보고 유혹물이라고 부르는지 무척 궁금했다. 방직회사 사원 노릇을 할 때 요릿집에나 마지 못해 몇 번 따라가 본 재가 '카페, 이게 바로 유혹물이라는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된 것은 본과 2학년 시절 이후였다.
본과 즉 '조선어학급 문학과'에 들어가니 제1회생인 ★조윤제 군이 혼자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는 내가 조선문학과에 들어 온 것을 어찌나 반가와 하는지 몰랐다. 나중에 그는 문학 전공이고 나는 어학 전공으로 각각 갈렸지만, 우리는 줄곧 강의를 같이 들었다.
맨처음 조군과 만난 강의시간은 ★다까하시 선생의 연습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는 퇴계 선생의 사단칠정에 관한 왕복 서간이 교재가 되었다. 주자학(성리학)의 깊은 이론에 관한 논란이며, 순전히 한문으로 된 텍스트였던만큼 굉장히 어려웠다.
조군이 나를 반긴 데는 까닭이 있었다. 나와 둘이 듣게 되니, 예습에 대한 자기 부담이 반 열기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꾸라 선생 아래서 본격적으로 국어학 연구를 시작했다. 우리 과에는 일인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제3회로는 ★김재철, ★이재욱 양군이 들어왔다. 김재철은 충북 괴산의 부잣집 아들이었다. 풍류남아인 그는 술을 즐기고 여자를 무척 좋아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단명하게 한 원인일 것 같다. 졸업 후 평양사범학교에서 교유를 지낸 그는 [조선연극사]를 저술하여 사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재욱 군은 김군과는 정반대로 성격이 찬찬하고 아주 점잖은 군자였다. 그는 해방 전부터 줄곧 조선총독부 도서관에 근무하다가 해방후 국립도서관장으로 있었지만 6.25때 납치당하고 말았다.
이들은 나와 연령이 다르고 둘이 다 문학전공이었지만, 한데 잘 어울려 의기가 상통했다. 김군은 나이 많은 나를 꼭 영감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김재철 군이, "영감 존 데 갑시다." 하기에, "좋은 데가 어디야." 하니, 무조건 따라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난생 처음 카페라는 데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때 서울에는 요새와 같은 다방은 꼭 두어군데 밖에 없었지만 카페는 상당히 많았다. 그후부터 김재철, 이재욱 두 학우는 꼭 나를 이끌고 카페를 무상출입했었다.
부잣집 아들인 ★김재철은 매일 돈 5원을 넣고 나온다. 그때 돈 5원이면 컸다. 명월관에서 5원만 주면 두어 사람이 한 상 잘 먹을 때였다. 우리는 얼근히 취해서 종로 거리에 카페를 순유했다.
'조선아학급 문학과'에는 제4회째 지망생이 없었고, 5회째가 바로 ★이숭녕, ★방종현 양군이 들어왔다. 이때 나는 벌써 졸업을 하고 경성사범학교의 교유가 된 때였다. 그러나 조선어를 연구하는 학도가 손꼽을 정도인 그때 사정으로 봐서, 우리는 10년 지가나 다름없이 친해졌다.
방군은 부산 피난지에서 서거하였다. 호방하면서도 치밀한 그 학풍, 성실하고 원만한 호인인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니 그는 실로 대인재자의 풍도였다.
우리는 조선어문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同人誌]을 얼마간 내 보았다. 인쇄는 안국동에 있던 한성도서회사에서 했고, 이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경성사범학교에 재적중 어느날 ★오꾸라 선생의 부름을 받았다. 오꾸라 선생은 연구출장비 60원을 주면서 우리나라 무당이 굿을 할때 쓰는 용어를 채집해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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