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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61 ---이제현의 익재난고 02 (이제현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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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30 13:29 조회1,8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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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한시3- 익재 이제현 시선 (허경진 엮음, 1987, 평민사)


●이제현 묘지명

지정(至正) 27년 정미(1367) 가을 7월에 --- 익재 선생 이공이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하니 나이 81세였다.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내리고, 그해 10월에 유사(有司)가 위의를 갖추어 우봉현(牛峯懸) 도리촌(桃李村)의 선영 아래 장사하였으며, ---

공의 휘(諱)는 제현(齊賢)이고, 자는 중사(仲思)며, 아버지의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좌명대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알평(李謁平)이 있었는데, 그 후손인 소판 거명(居明)이 병부령 금현(金現)을 낳았고, 병부령이 삼한공신 태수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傅)가 국토를 바치려고 고려에 들어와서 태조의 딸 낙랑공주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을 금서의 아내로 삼아 주어 윤홍(潤弘)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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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尙衣)가 증 좌복야 휘 핵(  )를 낳고, 복야가 검교정승 시 문정공(文定公) 휘 진(王眞)을 낳았다. 진이 대릉직 박인육(朴仁育)의 딸 진한 국대부인에게 장가들어, 지원(至元) 정해년(1287) 경진일에 공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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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재(菊齋) 권부(權溥)와 열헌(悅軒) 조간(趙簡)이 예위의 시관이 되었을 적에도 공이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권공이 공을 사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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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병자년(1336)에는 삼중대광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하여졌고 영예문관사가 되었다. 기묘년(1339) 봄 2월에 충숙왕이 훙(薨)하였는데, 그해 가을에 정승 조적(曹  )이 백관을 위협하여 군대를 영안궁(永安宮)에 주둔시키고, 임금 곁의 나쁜 소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라고 선언하면서, 몰래 심왕의 지반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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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나이 70에(1356년) 김해후(金海侯)에 봉하여졌고, 12월에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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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이 실각하자 공민왕이 말하기를,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라갈 수 없도다. 일찍이 신돈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지금 과연 증험되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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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길창국부인 권씨(▶권부의 딸) 는 2남 (서종, 달존) 3녀 (임덕수, 이계손, 김희조에 출가)를 낳았는데, --- 그 다음 딸(▶3녀)은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여 의화택주에 봉작되었다.

수춘국부인 박씨는 ---휘 거실(居實)의 딸로 1남 (창로) 3녀 (박동생, 송무에 출가, 충?왕비 혜비)를 낳았는데, ---

서원군부인 서씨는 ---휘 중린(仲麟)의 딸로 2녀(김남우, 이유방에 출가)를 낳았는데, ---

측실(側室)이 2녀(임부양에 출가, 차녀는 아직 어리다.)를 낳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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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宗簿 : 서종)은 ---홍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보림) 2녀를 낳았는데,  --- 또 검교중랑장 김송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원익)를 낳았는데, --- 또 밀직 최항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총랑(摠郞 : 달존)은 상당군 백이정(白이正)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덕림, 수림, 학림) 1녀(기인걸에 출가)를 낳았는데, ---

개성(開城 : 창로)은 중대광 청성군 시 평간(平簡) 휘 공의(公義)의 딸 한씨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원서에 출가)를 낳았는데, --- 계실(繼室)은 정순대부 전객시사(典客寺事) 김묘(金昴)의 딸로 2남(반, 곤) 1녀(아직 어리다)를 낳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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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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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찬



● 이제현, 삼천 년의 제일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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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은 1287년(충렬왕 13)에 개성에서 검교정승 문정공 이진(李,王眞)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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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년(56세)에는 잠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역옹패설>을 지었다. 시화집이자 만록인 이 <역옹패설>은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규보의 <백운소설>과 함께 고려조의 대표적인 시화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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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에 대한 현대적인 논평은 1931년 출판된 김태준의 <조선학문학사>에서 비롯된다. 이 책에서 김태준은 '이제현의 문학' 이란 항목을 두고 여러 가지로 소개한 뒤 "익재는 유가라기보다 문장가요 문장가라기보다 시인으로 성공한 자다" 라고 결론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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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은 평생동안 시문을 지었다. 그러나 그렇게 지은 시문은 곧 없애 버렸다고 한다. 측근에서 "왜 모아서 문집을 만들지 않느냐" 고 하면 "동암공(東菴公: 이제현 부친의 호)이 아직 문집을 만들지 않았는데, 자식인 내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익재난고>에 전해 오는 이제현의 시문도 그가 71세 되던 해에야 엮어졌다. 막내 아들 창로와 손자 보림이 이제현의 생전에 문집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때 비로소 이 사람 저 사람이 간직하여 둔 시편과 익재 자신이 간직한 약간의 시편을 모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전해오는 시 274수는 이제현이 일평생 지은 시 가운데 극히 일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현과 같은 대시인의 시가 대부분 유실되어 버린 사실은 우리 국문학상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류풍연 (문학박사, 전주대 교수)



● 이제현 연보

1287년, 12월 경진일에 이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대릉직 박인육의 딸로 진한 국대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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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년, 백이정의 문인으로서 정주학을 연구하였다.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사 원명선 조맹부 장양호 우집 등과 교유하여 문학이 크게 진취되었고, 조맹부의 서체를 배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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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9년, 상왕을 모시고 강향사로 강남 보타굴에 다녀왔다. 이때 왕명으로 오수산이 이제현의 화상을 그렸고, 탕병룡이 찬을 지었다.

1320년, --- 9월에는 지공거가 되어 최용갑과 이곡을 선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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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5년, ---또 김해군의 봉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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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년, 충숙왕이 훙(薨)하고 정승 조적이 난을 도모하자 충혜왕이 이를 격살하였는데, 원나라가 충혜왕을 불러 들이니 민심이 동요되었다. 이에 이제현이 원나라 조정에 상서하여 사건을 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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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년 여름에 <역옹패설?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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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년, 서연시강으로 있었는데, 조일신이 시기함을 보고 여러번 사임을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

1353년 정월에 우정승을 사임하고, 5월에 부원군으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 등을 급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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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5년, 왕이 신돈을 총애하므로 이제현은 신돈의 골상을 들어 경계할 인물임을 아뢰었고, 신돈은 백방으로 이제현을 해치려 하였다. 나중에 신돈의 본체가 드러나자 왕은 이제현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

1367년 7월에 병으로 사저에서 졸하니 태상에서 문충공의 시호를 내렸다. 겨울 10월에 유사가 위의를 갖추어 우봉현 도리촌의 선영 아래 장사하였으며, 1376년에 공민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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