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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62 ---이제현의 익재난고 03 (이제현과 우리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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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30 13:31 조회2,0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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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이제현 부자

1300년 충렬공께서 돌아가시자 이진(1244∼1321, 경주이씨 이제현의 아버지) 이라는 분이 충렬공 墓地銘을 撰하였다.

현재 충렬공 묘지석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79년에 후손 김윤회(당시 대종회 사무국장)가 필사하여 제작한 묘지석과 필사하기 전의 묘지석 약식 탁본(탁본시기 불명)이 안동김시 대종회관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명에서 이진은  ---나는 과갈(瓜葛)의 친분(親分)도 있고, 또 특별(特別)히 알아  주시고 대우(待遇)를 받은 자(者)이며, 또 사자(嗣子)이신 상국(相國=나라의 재상)의 간청(懇請)도 있음으로 해서 삼가 붓을 잡아 명(銘)을 쓰노라.--- 하고 있다.

과갈(瓜葛) : 인척관계 라 하는데 충렬공과 이진과의 인척관계는 알 수 없음.
1) 다만 이제현의 조모 (즉 이진의 모)가 김씨 였다는 기록<역옹패설>,  
2) 충렬공 백부 김창의 외손자가 이윤온 이라 하는데 경주이씨인 듯하므로<         >,
3) 이제현이 김해후, 김해군 봉작을 받고 있는 점과
충렬공 외조부 원흥진부사 낭장 김해부 宋耆 (1300 김방경 묘지명), 충렬공 母 추봉 금관국대부인 송씨 본금녕 (1300년대 광산김씨 김련-김진 호구단자)와  연관지어 볼 수 있음


사자(嗣子)이신 상국(相國=나라의 재상) : 1300년경 큰 아들 김선은 먼저 돌아가신 뒤이고, 당시의 재상은 둘째아들 김흔 장군 또는 셋째아들 김순 을 말하는 듯함.
둘째아들 김흔 장군은 1290년대 후반 충렬왕파와 충선왕파의 권력투쟁시 이승휴, 김흔, 박전지, 이진 등은 충선왕파의 측근이었고,  1299년 원나라에 가 있을때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귀국하여 복상을 마치고 다시 원나라로 갔다.--- 는 기록이 있음 <고려사 열전>
셋째아들 김순 은 ---선친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유원(遺願)에 의하여 고향 선영(先塋)에 장례를 모셨다. ---는 기록이 있음 <문영공 묘지명>


이진의 둘째아들 이제현은 문영공 김순(충렬공의 셋째아들)의 배위이신 제평군부인 양천허씨(허공의 따님)의 묘지명을 撰하기도 하여 그의 문집 <익재난고>에 남기고 있다.  또한 그의 시화집 <역옹패설>에 충렬공 기록이 실려 있다.



■ 정간공(김영후) 연보

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국헌(菊軒)<급암시급, 척약재학음집>. 온재(穩齊)<화해사전>.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문영공(김순)과 제평군부인 양천허씨(허공의 따님) 사이에서 4남3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영돈, 영휘, 사순, 영후) (정책, 백이정, 별리가불화에게 출가)

★이제현, 이달존, 박충좌, 민종유, 김영돈, ★안목 등과 함께 백상당문인 24인의 한 사람으로 둘째 매형 백이정의 문인이다. <화해사전 제자서술>

(50세)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적42)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삼사우사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정승 채하중, 상락(上洛) 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등과 1등 공신으로 정하여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또한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

(61세) 1352년(공민왕1 임진)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70세) 1361년 (공민왕10년 신축) 5월 임술일에 상락후(相洛侯) 김영후(金永煦)가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 안렴사공 백형 판사공 김사겸(金士兼) --- 무후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사이의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365년 종부령을 지냈고, 당시 삼사우윤 ★이창로, 군부판서 염흥방은 손아래 동서들이었다. <1365 이색찬 한공의 묘지명>
○벼슬은 판사를 지냈고,
○배위 청주한씨(父★한공의, 祖한악, 曾祖한사기, 外祖경사만)와의 사이에 1남(김우), 2녀(윤신보, 유소문에 출가)를 두었다.
○자 김우(金瑀,金禑)는 1365년 權務이었고, 벼슬은 부사를 지냈다. <1365 이색찬 한공의 묘지명>
○무후하여 후사가 이어지지 못하고, 묘소도 알 길이 없다.



■ 안렴사공(김사렴) 연보

○ 1335-1405 <1708 송천서원 건립시 문헌자료, 양촌집 '1403 회목과 회약' 참조>,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 국대부인 현풍곽씨와의 사이에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 1358년(공민왕7)에 비서감을 지내고, 당시 처조부 ★안목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을, 처부 안원숭은 군부판서 진현관으로 있었다. <1358 이색찬 (장인 안원숭의 외조모인) 김태현처왕씨 묘지명>
---김태현+왕씨 → 김태현 여 + 안목 → 안원숭 → 안원숭 여 + 김사렴


<1822년 외후손되는 남공철이 고려명신전을 지을 때 일민편에 안렴사공 기록을 수록하였다. 이를 근거로 1925년 대동기문에도 실리었다.>

김사렴은 평장사 방경의 후손이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지식과 문재가 뛰어나더니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정몽주, 이색과 친교가 깊고 모두들 임금에게 직간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신돈이 정권을 전단할 때 왕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우러러 섬기었다. 공민왕 14년에 신돈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 수정리순론섭리보세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왕이 자주 그 집에 행차하여 공치기와 연등놀이 연회를 갖고 상을 주되 은병, 안장, 능라금주, 천수필식을 주며 즐기었다.
사렴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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