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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67 ---권근(1352∼1409 )의 양촌문집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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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01 08:06 조회1,5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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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 (權近 1352∼1409 (고려 공민왕 1∼조선 태종 9)

고려말 조선초 학자·문신.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본관은 안동(安東). 시호는 문충(文忠). 1368년(고려 공민왕 17)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69년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고, 우왕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75년(우왕 1)에는 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였으며, 공양왕이 즉위하자 창왕의 외조부 이림(李琳) 일파로 몰려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도움으로 모면하였다. 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는데, 이때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했다. 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대사성(大司成)·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지냈고, 13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발생하자 정도전을 대신하여 명나라에 가 해명을 잘하여 명나라 황제의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이 일로 정도전 일파의 미움을 샀으나, 제 1 차 왕자의 난으로 그들이 숙청되고, 1401년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대사성(大司成)·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이사(貳師) 등을 지냈으며,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했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을 기울였는데,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하여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하였다.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인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고 이 밖에 《양촌집(陽村集)》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등이 있다.



● 양촌문집 (陽村文集)

고려 말 조선 초기 학자 권근(權近)의 시문집. 초간본은 둘째아들 ★도(蹈)가 세종 초년에 편집, 간행한 것이나 현재 그 완전한 모습은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판본에는 도(蹈)의 초각보인본(初刻補印本), 10대손 주의 복각본, 12대손 업이 선대의 복각본을 재차 복각하여 펴낸 3종이 있다. 책 가운데 《동국사략전(東國史略傳)》은 신라 역대 왕조의 사실(史實) 중에서 쟁점이 되는 사항에 대하여 자신의 비평적 의견을 개진한 사론집(史論集)으로서 모두 28항이 취급되었다.
《동현사략(東賢事略)》은 허공(許珙)·★김방경(金方慶) 등 고려 후기의 명현 24명을 뽑아서 그들의 사적을 서술한 전기집이다. 이것들은 이 책의 여러 곳에 보이는 시부(詩賦)에 더한 자주(自註) 및 비지(碑誌) 등 금석문자와 함께 그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편, 책머리에 실린 응제시(應製詩) 24수는 조선 초기 조명외교(朝明外交)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공헌하였다. 권근은 1396년(태조 5)에 자청하여 명(明)나라로 건너가 뛰어난 문학으로 이름을 떨치고 응제시를 지어 올리는 등의 적절한 주선으로 표전문제(表箋問題)를 잘 풀어내었고 명 태조의 어제시(御製詩)를 받기도 하였다. 《양촌문집》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사연구회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3집으로 출간했는데, 초각본을 영인하여 40권을 7책으로 분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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