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68 ---권근(1352∼1409 )의 양촌문집 02 (동현사략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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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01 08:07 조회1,837회 댓글0건본문
●양촌선생문집 제35권
동현사략 東賢事略
중찬(中贊) 허공(許珙)
중찬 ★김방경(金方慶)
찬성 권단(權?)
중찬 홍자번(洪子藩)
정승(政丞) 권보(權溥)
판문하(判門下) 조인규(趙仁規)
찬성 채홍철(蔡洪哲)
정승 김태현(金台鉉)
찬성 최성지(崔誠之)
찬성 정해(鄭?)
판첨(判僉) 민지(閔漬)
찬성 민상정(閔祥正)
밀직(密直) 왕백(王伯)
대제(待制) 최해(崔瀣)
좨주(祭酒) 우탁(禹倬)
밀직(密直) 조렴(趙廉)
우사(右使) 김광재(金光載)
정승 한종유(韓宗愈)
정승 김륜(金倫)
참리(參理) 최문도(崔文度)
영첨(領僉) 이공수(李公遂)
찬성 안축(安軸)
정당(政堂) 정사도(鄭思道)
시중(侍中) 홍언박(洪彦博)
●양촌선생문집 제35권
동현사략 東賢事略
중찬 ★김방경(金方慶)
공은 자(字)는 본연(本然)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은 직사관(直史館)을 지냈고, 아버지 효인(孝印)은 병부 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의 15대 손이다. 처음 벼슬은 식목 녹사(式目錄事)였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아껴서 요직을 맡겼다. 그 뒤로 내직(內職)ㆍ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훌륭한 치적(治績)을 이루었다.
충경왕(忠敬王)이 강도(江都)에 있을 때 권신(權臣) 임연(林衍)이 멋대로 폐립(廢立)하였는데, 이때 충렬왕은 세자로 원(元)에 가 있었다. 공은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으면서 세자가 있는 곳에 달려가 알리매, 세자가 연의 죄를 다스리고자 군대를 청하니 제(帝)가 몽가독(蒙哥篤)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세자는 공을 선도(先導)로 삼아 본국에 채 못왔을 적에 왕이 복위(復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처음에, 공은 원군(元軍)이 대동강을 건너면 나라가 진동되어 변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아뢰어, 원군으로 하여금 서경(西京 평양)에 주둔하여 성원(聲援)만 하게 하고 강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북 지방의 반민(叛民)들이 난을 이용하여 나라를 삼키려는 속셈으로 무고하기를,
"고려가 원군을 섬멸할 것을 도모, 배반하여 제주(濟州)로 들어가려 하니, 사냥한다 소문내고 대동강을 건너가 서울을 엄습하여 여자와 재물을 모두 얻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몽가독이 따르려 하므로 공이,
"조서(詔書)를 어기고 강을 건너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극력 반대하였으므로 중지하였다. 왕이 조서를 받들고 다시 송도(松都)로 옮겨올 때에, 연(衍)의 무리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들어가 웅거했다가 다시 제주로 들어가니, 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모두 쳐서 평정하였으므로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제수하였다.
지원(至元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갑술년(원종 15, 1274)에 제의 명을 받들고 동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대마도 등 3도를 쳤다. 충렬왕이 즉위하여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삼아 제에게 포로를 바치게 하니, 제가 금호부(金虎符)주D-001를 차게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금호부를 찬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축년(충렬왕 3, 1277)에 위득유(韋得儒)ㆍ노진의(盧進義) 두 사람이 공과 한희유(韓希愈)를 무고하여 ‘반역을 모의한다.'고 하므로, 원(元)에서 사자를 보내어 국문(鞫問)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어서, 은혜를 입어 높은 품계에 올랐는데 어찌 거짓 자복하여 나라에 환을 끼칠 수 있겠는가."
하고, 끝까지 승복(承服)하지 않자 조서(詔書)로 공과 위ㆍ노 2인을 불러 같이 경사(京師)에 와서 변명하게 하였는데, 노는 도중에 혀가 문드러져 갑자기 죽었고, 위는 중서성(中書省)에 소장(訴狀)을 낸 지 10일 남짓하여 역시 혀가 문드러져 죽으니, 사람들은 ‘천벌을 받았다.' 하였으며, 공은 석방되어 돌아왔다.
경진년(충렬왕 6 1280)에 조서를 내려 중봉대부(中奉大夫)를 제수하여 고려군 도원수를 맡게 하고, 이어서 다시 일본을 정벌하라 하므로 신사년(충렬왕 7, 1281) 6월에 진격하여 일기(壹岐) 및 박가대 지하(朴加大志賀 박다(博多)를 말함) 등의 섬을 쳤다. 강남군(江南軍)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으므로 머물러 그들을 기다리던 중, 8월에 태풍을 만나 전함(戰艦)의 반 이상이 전복되어 다시 싸울 수 없게 되자, 공은 모든 배에 영을 내려 말과 갑옷을 버리게 하고 패선(敗船)의 군졸 1천여 명을 싣고 돌아왔다. 을유년(충렬왕 11, 1285)에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으며, 다음해 병술년에 89세로 졸하였는데 조용히 앉아서 죽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공은 천성이 충직하고 미더우며 엄하고 과묵하였으며 근검으로 몸을 단속하여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았고 세수하는 물은 한 사발을 점지 않았으며, 친구를 잊지 않고 상(喪)을 당하면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가서 조문(弔問)하였다.
[주 D-001] 금호부(金虎符) : 한 대(漢代)에 주군(州郡)에서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가 차던 부신(符信)이었다. 《원사(元史)》 병지(兵志)에 "만부(萬夫)를 통솔하는 자는 금호부를 찬다." 하였다. 동호(銅虎)·동부(銅符)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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