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73 ---1478 동문선 1518 속동문선 03 ---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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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04 08:22 조회1,626회 댓글0건본문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원수 김방경이 탐라를 쳐서 평정함을 축하하며[賀元帥金公方慶攻下耽羅]
유천우(兪千遇)
북에서 온 일만 말이 채찍을 따르지 않고 / 北來萬馬不隨鞭
남쪽에 모인 삽살개 떼들이 하늘이 보고 짖으려 하네 / 南聚群尨欲吠天
길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이미 길들였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들을 제어했나니 / 馴旣難馴制難制
공을 논할 양이면 어찌 능연각에 오를 뿐이랴주D-001 / 論功何止上凌煙
[주 D-001] 공을 논할 양이면 어찌 능연각에 오를 뿐이랴 : 당 나라 태종(太宗)이 능연각(凌煙閣)에 공신(功臣)들의 초상을 그렸다.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복주(福州)주C-001
김방경(金方慶)
산과 물은 모두 옛 눈에 보던 푸르름인데 / 山水無非舊眼靑
누대도 또한 바로 소년 때 정일러라 / 樓臺亦是少年情
기특하여라 고국에는 옛 풍속 남아서 / 可憐故國遺風在
악기와 노래를 모두 거두어 모아 내 걸음을 뒤로하네 / 收拾絃歌慰我行
[주 C-001] 복주(福州) : “신사년(辛巳年)에 동으로 일본을 치다가 군사를 돌이킬 때 복주에 이르다.”라는 제주(題註)가 있다.
동문선 제40권
표전(表箋)
●알리는 글[告奏表]
김구(金坵)
군사를 주둔시켜 위엄으로 제재함은 대적할 수 없는 황위(皇威)를 신뢰하는데, 여러 날을 두고 오래 끄는 것은 대개 사율(師律)이 올바르지 못한 까닭이므로, 이에 간곡한 말씀을 아뢰니 우러러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사나운 저 반역의 도당이 먼 바다에 둔쳐 있음으로써, 토벌하는 관군을 번거롭게 하였지만, 우리 군사를 원조하겠다는 허락을 받았니, 이제는 군사가 많고도 강하게 되었으며, 또한 흉한 무리도 항복 받고 없애기 쉽게 되었습니다. 소국의 통군참지정사(統軍參知政事) 김방경(金方慶)이 처음으로 해군을 단속하여 곧장 쳐부수려고 하였는데, 아해(阿海)원수(元帥)가 좋지 못한 놈들의 방자히 꾀는 말을 듣고, 즉시 방경(方慶)을 잡아서 왕경(王京 원 나라 서울)으로 압송하고, 그 설비한 병선(兵船)과 뽑아 훈련시킨 군인을 모두 돌려보냈는데, 다행히 다루가치를 만나서 그 실정을 조사해 본즉, 모두 터무니없는 사실이므로 곧 방경을 돌려보내어, 다시 병선을 갖추고 군인을 징집하여 지난해 11월 22일에 접전하는데, 우리 배 백여 척이 적선 30척과 상대하게 되자, 오직 방경의 장군 양동무(楊東茂)의 배가 먼저 들어가서 힘껏 싸우고, 아해(阿海)는 서로 구원하지 않고 물러서서 정세만 구경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못했던 것이며 지금까지 한갓 마초와 군량만을 허비하고 있으니, 실로 마음이 쓰라린 바옵니다. 무릇 조지(詔旨)를 받들고 사무에 분주하는 백성들도 모두 병소(兵所)에 나간 것은 하루 빨리 그 완악한 무리를 제거하고자 함이요, 또한 오로지 칙조(勅條)에 대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지난번 사건의 전말은 통역(通譯) 김원기(金元器)가 싸움을 목격하여 모두 아니, 불러다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절차장군(節次將軍) 인공수(印公秀)의 아뢴 바도 아울러 통촉하여 주소서.
동문선 제54권
주의(奏議)
조진 시무 서(條陳時務書)
●우(又)
조준(趙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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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이 없으면 후(侯)를 봉하지 않음은 우리 조정의 법이므로, 김 시중(金侍中) 부식(副軾)이 참란(僭亂)을 덜고 서도(石)를 평정하였기에 낙랑후(樂浪侯)에 봉하였고, 김 정승(金政丞) 방경(方慶)은 탐라(耽羅)가 반(叛)한 것을 치고, 동왜(東倭)의 죄를 물었으므로 상락공(上洛公)에 봉하게 되었는 바, 원하건대 이제부터 재상 중에 안사정란공신(安社靖亂功臣)이 아니거든 봉군(封君)을 하지 마옵소서.
동문선 제62권
서(書)
●상 정동성 서(上征東省書)
이제현(李齊賢)
---충렬왕 때에 세조께서 두 번 일본을 정벌하였는데, 왕이 김방경(金方慶) 등을 보내어 그 전함을 수리하고 매양 선봉이 되었으며, ---
동문선 제112권
소(疏)
●도원수 김시중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
석복암(釋宓菴)
현관(玄關 불문에 들어가는 관문)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화는 감동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게 되옵고, 주벌(朱閥 궁궐)의 아래에 복을 비는 정성은 지극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하물며 막측(莫測)한 땅을 정벌하려면, 미연의 우환을 먼저 막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니, 현후(賢侯)께서는 성대에 태어나서, 일찍이 백여 차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두 왕대에 높은 벼슬을 역임하셨습니다. 중봉(中奉 중봉대부)과 중찬(中贊)이 모두 높은 직위요, 상장(上將)과 상상(上相)이 함께 귀한 자리입니다. 초변(貂弁)과 선관(蟬冠)은 덕망이 중하여서 백관들이 무릎걸음으로 공경을 표하고, 호부(虎符)와 귀인(龜印)은 위엄이 높아서 삼군(三軍)이 팔뚝을 떨면서 명령을 듣습니다. 이제 융거(戎車)를 몰아 왕궁 밖으로 나와서, 장차 훼복(卉服)주D-001들을 무찌르려고 1만 군사를 몰아 나감을 제갈공명이 촉(蜀)을 출발하는 듯하고, 1천 척의 배를 출동함은 왕준(王濬)주D-002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보다 승합니다. 이러한 때에 부처님의 도움을 받게 되면 얼마 안 가서 개선(凱旋)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묘한 공양을 장만하여, 특별한 법식을 차립니다. 이 정성스러운 마음이 부처님의 원명한 거울에 맞으시기 엎드려 원합니다. 운운. 한 돛이 바다를 잘 건너서 왜구(倭寇)들의 항복을 보게 되고, 일만 깃발이 무사히 돌아와서 순 임금 뜰에 첩서를 올리듯 하소서. 공명을 죽백(竹帛)주D-003에 길이 드리우고, 세월은 소나무와 참죽나무[椿]처럼 새로워지이다.
[주 D-001] 훼복(卉服) : 섬 오랑캐는 풀[卉]로 옷을 지어 입는다고 해서 일본(日本)을 훼복이라고 말한다.
[주 D-002] 왕준(王濬) : 중국 삼국시대 말기 진(晋) 나라 사람.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오 나라 서울을 함락시키고 오 나라 임금의 항복을 받았다.
[주 D-003] 죽백(竹帛) : 예전에 종이를 발명하지 못하였던 때에는 모든 기록을 대[竹] 가지나 비단[帛] 폭에 썼었다. 그래서 역사를 죽백이라고 말한다.
동문선 제124권
묘지(墓誌)
유원 봉의대부 태상예의원 판관 요기위 대흥현자 고려 순성보익 찬화공신 삼중대광 우문관 대제학 영예문관사 순천군 채공 묘지명(有元奉議大夫太常禮儀院判官驍騎尉大興縣子高麗純誠輔翊贊化功臣三重大匡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順天君蔡公墓誌銘)
이곡(李穀)
지원(至元) 6년주D-001 경진(충례왕 복위 원년) 정월 10일 계해에 대흥현자 순천군(大興縣子順天君)채공(蔡公)이 나이 79세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장차 예로써 장사지내려는데 그 아들과 사위들이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문을 청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공의 행실과 의리는 한 세상에 높았고, 공덕은 온 나라에 알려졌는데 명문을 짓는 데 무엇이 어려우리오,” 하였다.
공의 휘는 홍철(洪哲)이요, 자는 무민(無悶)이니 교주도 평강현(交州道平康縣)이 본향이다. 나이 18세에 문학에 능하여 성균시에 합격하고, 22세에 진사로 급제하여 처음으로 응선부 녹사(膺善府錄事)에 임명되었다.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가,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나가서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는데, 얼마 후에는 부사의 관직을 버리고 곧 집에서 한가로이 있으니 무릇 14년이었으며, 스스로 중암 거사(中菴居士)라 호하고, 항상 불교의 교리와 거문고ㆍ책ㆍ약제 등으로 일상사를 삼았다. 천성이 또 사사로이 높은 사람에게 찾아보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일에는 욕심도 없이 깨끗하게 종신(終身)할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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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김씨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인데 역시 아들이 귀하게 되었으므로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하였으며, 부친의 휘는 모인데 지위는 첨의중찬 상락공(僉議中贊上洛公)에 이르렀고, 원 나라 세조 황제의 조정에 공이 있어 중봉대부 도원수(中奉大夫都元帥)를 주었다. 부인은 유순하고 착하여 규문의 법도를 잘 지켰으며, 자녀 다섯을 낳았다.
맏아들 하중(河中)은 원 나라 궁중에 숙위하여 태부부 자의참군(太傅府恣議參軍)에 선임되었고, 간간 본국에 벼슬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현재는 평강군(平康君)이 되었다. 둘째 아들 하로(河老)는 판종부사사(判宗簿司事)이며, 셋째 아들은 선지(先智)인데 불교를 배워 계조연진 대선사(繼祖演眞大禪師)가 되었다. 맏딸은 현재 계림부윤 검교 첨의평리(鷄林府尹檢校僉議評理)설현고(薛玄固)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작고한 좌우위 보승별장(左右衛保勝別將)정광조(鄭光祖)에게 출가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모범을 잃었고, 나라에서는 길장이를 잃었으니, 모두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초8일 경인에 성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문에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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