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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75 ---1478 동문선 1518 속동문선 05 --- 김승택, 김영돈, ?김좌랑, 김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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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04 08:26 조회1,4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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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송당 선생 김공 묘지명 병서 (松堂先生金公墓誌銘 幷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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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광식(光軾)이고, 자(字)는 자여(子輿)이며,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니, 광주(光州) 사람인 사공(司空)김길(金吉)의 후손이다.

---아들과 사위들이 영구를 받들고 서울로 돌아와서 모월 모일에 덕수(德水)에 있는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
공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시호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의 딸을 아내로 맞아 자녀 둘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흥조(興祖)로 성격이 쾌활하며 큰 뜻이 있었고, 벼슬이 중현대부 군기감(中顯大夫軍器監)에 이르렀으며, 수원(水原)ㆍ해주(海州)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매우 현저하였으나, 취성(鷲城 신돈)의 손에 죽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 딸은 봉선대부 내부부령(奉善大夫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출가하였으니,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다. 손자는 남녀 몇이 있으니,



동문선 제2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호종백마산 응어제(扈從白馬山應御製)


김영돈 (金永暾)

취보로 창해 위를 찾아 가노니 / 翠葆行尋蒼海上
흰 구름 사이로 옥퉁소 불어 보내네 / 玉簫吹送白雲閒
한 티끌 홍진도 날아오기 어려운데 / 紅塵一片飛難到
만 점 푸른 소라 비 갠 뒤의 산이로세 / 萬點螺分雨後山




동문선 제100권

전(傳)

정씨가전(鄭氏家傳)

----갑진년 봄에 참리 첨의사(叅理僉議司)가 되었고, 을사년에 찬성사 연영전 대사학 동수사(延英殿大司學同修史)에 승진되었고, 4월에 공거(貢擧)를 맡아서 장자빈(張子贇) 등 33명을 뽑았는데 이때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얻었다고들 하였다. 정승(政丞)한종유(韓宗愈), 정승 ★김영돈(金永旽)은 모두 공의 문인이었다. 이해 6월 5일에 옛 질환이 일어나서 저녁이 되어 깨끗이 세상을 마쳤다. 유언에 의하여 장례를 간소하게 지냈다. 나이는 52살이었다.



동문선 제68권

기(記)

함벽루 기(涵碧樓記)


안진(安震)

내가 15세 되던 해부터 초가집에서 글을 읽으며 사방을 모른 지가 10년이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의 과거에 응시하려고 평양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영명사(永明寺)부벽루(浮碧樓)를 보았고, 5년 뒤에 진양(晉陽)의 원으로 나가서 또 용두사(龍頭寺)상원루(狀元樓)에 올라 평생에 본 남북의 절경이 이 두 누대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어제 왕사(王事)로 인하여 강양(江陽)으로 가는데 도중에 한 누대를 바라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하고 단청이 눈부셔 봉황이 반공에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누대는 어느 때에 지은 것이며 터를 잡은 이는 누구인가.”하니, 객이 대답하기를, “지금의 태수가 새로 창건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듣고 기뻐하여 배를 띄워 강을 건너 난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그 강산의 면모와 형세가 지난번에 본 두 누대보다 못하지 않고 단장의 기이함은 그보다 나았다. 아, 이 고을이 있는 때로부터 곧 이 산이 있었고, 옛날의 영웅 호걸들이 와서 이 고을을 다스린 자도 많았으나, 한 사람도 푸른 산을 파고 맑은 물 가까이에 누대를 세운 자가 없었는데, 오직 태수가 비로소 얻었으니, 이 어찌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었다가 그 사람에게만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술잔을 들어 노래하니,

흰 구름이 나는데 산은 푸르고 / 白雲飛兮山蒼蒼
밝은 달이 떴는데 물은 질펀하도다 / 明月出兮水泱泱
누대 위를 사시사철 보아도 부족하니 / 樓上四時看不足
아득한 내 회포여, 멀고 먼 하늘 저쪽이로다 / 渺渺余懷天一方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마르더라도 / 山其崩兮水亦渴
태수의 덕은 잊을 수 없도다 / 使君之德不可忘

하였다. 객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노래를 써서 이 누대의 기(記)로 삼는 것이 좋겠다.”하기에, 내가 곧 붓을 가져다 썼다. 그 경영(經營)의 보태고 뺀 것과 관람의 크고 적은 것은 시(詩)에 능한 자가 밝힘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 누대를 함벽(涵碧)이라고 일컬은 자는 누구이냐. 태수가 스스로 이름 지은 것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여러 대 동안 공신인 상락공(上洛公)의 아들 ★김군이다.



동문선 제11권

오언배율(五言排律)

좌랑 외삼촌에게 드리는 시[서문도 함께 싣다] [贈佐郞舅詩幷序]


정포(鄭?)

지정(至正) 2년 가을에, 내가 형님 사겸(思謙)과 함께 남쪽으로 귀양왔다가 10월에 일이 있어 복주(福州)에 모여 닷새 동안을 머물렀다. 그때 외삼촌 ★김좌랑(金佐郞)이 복주의 전나무골[檜谷]에 한가로이 사는데, 어느 날 사겸형과 나를 청하여 놀고 유목사(柳牧使)와 양통판(梁通判)이 자리를 같이하여 주안(酒案) 사이의 담소(談笑)의 즐거움이 평시(平時)와 같아 하루 종일을 놀고 갔었다. 그 다음해 여름에 이르러 교지(敎旨)가 내려 나를 복주에, 사겸형을 청주읍(淸州邑)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는데, 막상 이르러 본즉 유목사와 양통판이 다 사직하여 갔고 외삼촌 또한 계시지 않아, 황량(荒凉)한 여사(旅舍)에 함께 즐길 사람이 없어 강산 천 리에 생각만 아득히 되풀이하였다. 한 달 남짓 있노라니 외삼촌이 서울서 돌아와 내가 유락(流落)해 있음을 불쌍히 여겨, 나를 위로할 길을 생각하여 날마다 즐거운 놀이를 벌여 산에 오르고 물에 놀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니, 마음이 헌칠, 정신이 흐뭇하여 영욕(榮辱)을 다 잊어 버리고 숫제 자신이 한인(閒人) ㆍ 은사(隱士)나 된 듯, 귀양살이의 신세임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아아, 인생의 모였다 헤어짐이 모두 수(數)가 있으니, 이제 내가 이곳에 귀양와 있음에 유(柳)와 양(梁)은 다 가고 홀로 외삼촌만이 계심은 어찌 하늘이 우리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예서 상종(相從)하게 함이 아니랴. 감탄이 그지없어서 이 시를 짓는다.

천리 밖에 이 몸이 귀양을 와서 / 千里身仍竄
금년에 신수가 더 야릇해라 / 今年數更奇
떠도는 신세 어디다 의탁할 것인가 / 飄零何所托
몸과 그림자만이 붙어 다닐 뿐 / 形影只相持
유학을 닦았으나 어디다 쓰리 / 儒術將安用
빈 말은 마침내 베풀 길 없네 / 空言竟莫施
세상의 웃음 살 줄 내 알았거니 / 自知爲世笑
남의 충고 듣기도 안 좋아하네 / 又不喜人規
곧은 도는 삼출주D-001을 만난다더니 / 直道連三黜
여생에 백 가지 어려움을 만났네 / 餘生遇百罹
친한 벗은 멀리서 서신도 없고 / 親朋無遠信
타관에 아는 사람 적네 / 羈旅少相知
반가울사, 내 외숙 한 분이 있어 / 好事逢吾舅
청담은 곧 나의 스승 / 淸談郞我師
성미가 피차에 서로 맞으니 / 風襟自有契
내왕도 저절로 무시로 하네 / 來往亦無期
좌상에 술병은 늘 가득하고 / 座上樽常滿
등 앞에 자리를 다시 옮겨서 / 燈前席更移
기쁨을 찾으니 마음이 흐뭇하고 / 覓歡心袞袞
체모를 생략하니 즐거움이 그지없어 / 省事樂熙熙
초목에도 화기가 뜨고 / 草木浮和氣
계산도 고운 모습 나타내는데 / 溪山有令姿
먼 마을을 나란히 말타고 가며 / 聯?村巷遠
나직한 수정에 잔 들고 앉아 / 把酒水亭卑
어초하는 늙은이와 짝을 짓기도 / 却伴漁樵老
사냥하는 젊은일 좇아가기도 / 閑追射獵兒
느낀 회포에 노래 부르고 / 感懷歌正冽
보이는 물색에 눈물 흐르네 / 覽物淚空垂
옛일을 생각하니 산간주D-002 같아서 / 憶昔同山簡
한창 겨울 습지에서 취했었네 / 方冬醉習池
파연곡 부르며 잔치 끝난 뒤 / 笙歌淸?後
등불을 들고 돌아올 그때 / 燈火夜歸時
모였다 헤어짐이 꿈과도 같아 / 聚散還疑夢
슬픔과 기쁨은 시에나 싣네 / 悲歡只有詩
가엾은 내 신세 위로되는 건 / 蹉?猶可慰
늙어도 정정한 이 몸 / ??未全衰


[주 D-001] 곧은 도는 삼출 : 춘추 때 유하혜(柳下惠)가 곧기 때문에 세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 났으나, 버리고 가지 않으므로, 사람이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곧은 도(道)로써 사람을 섬기면 어디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으리오. 굽은 도(道)로써 사람을 섬기어 하필 부모의 나라를 버릴 것이냐.” 하였다.
[주 D-002] 산간 : 진(晋) 나라 산도(山濤)의 아들.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하면서 나가 놀기를 좋아하여, 흔히 경치 좋은 습가지(習家池)에 가서 술에 취해서는 백접리(白接?)를 거꾸로 쓰고 말을 거꾸로 타고 돌아오는 등 풍류 기화(奇話)를 많이 남겼다.




속동문선 제14권

기(記)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김종직

상주(尙州)가 낙수(落水)의 상류에 있어서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은 동남에서의 한 커다란 도회(都會)였다. 중국의 정치적인 손님과 일본의 공을 바치는 사신들이 줄로 잇게 오가는 것이었다. 대체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자는 3분의 1이 못 되고 모두들 관현(管絃)을 지나쳤으므로, 이 고을이 그들이 복주하는 교차 지점에 있는 만큼, 의당 높고 굉걸한 누각이 있어서 그 의식에 말맞고 첨시에 장하게 할 것이요, 햇빛을 가리어 더위를 잊을 만큼 하여야 함이니, 이것이 곧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전하(殿下) 18년 정미년 봄에, 순창(淳昌) 설공(薛公) 순조(順祖)가 이 고을 원이 되어, 이 다락의 지붕과 마룻대가 흔들리고 기울어지며, 난관과 설주가 비뚤어져 기와는 처마 끝에 나부끼고 비는 벽에 들이쳐 단청과 도벽이 씻겨 희미해져서, 오르는 자 관현악을 베풀기도 전에 더러운 빛이 드러나므로 개연히 준수하고자 하였었다. 그해 가을에, 통판(通判)고양(高陽)신후(申侯)질(礩)이 뒤를 이어 이르러서 의논이 합하매, 그 다음해 봄에, 농무(農務)가 시작되기 전에 재목을 모아 성중에 실렸더니, 가을 9월에 이르러서 옛집을 뜯고 그 크기를 넓혔으나, 겨우 30여 일 만에 연장과 흙손을 쉬게 되었었다. 이 다락의 굉창(宏敞)과 화려함에 대적할 것이 없고, 성과 못, 거리와 동네가 모두 덕색(德色)이 있고, 무릇 경내(境內)의 산천으로서 진(鎭)이 되고 침(浸)이 될 만하여, 그 높고 깊음이 더 하여진 듯 싶었다. 설공이 이에 나의 벗 그 고을 교수(敎授) 주군(周君) 윤창(允昌)을 시켜, 글월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 쓰기를 청하였었다.
내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하건대, 원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에 관사를 중수하여 위치가 알맞게 한 이는 목사(牧使) ★김영후(金永煦)였고, 그 기문을 지은 이는 근재(謹齋)였다. 명 나라 홍무(洪武) 경술년(庚戌年)에 관사의 동편을 열어서 새 정자를 그 땅에 세운 이는 목사 김남득(金南得)이었고, 이름을 풍영(風詠)이라 하며, 또 기문을 쓴 이는 목은(牧隱)이요, 시를 쓴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러다가 경신년(庚申年) 병화에 정자가 역시 타버리고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다락으로 바꾸어 세운 이는 목사 송인(宋因)이요, 기문을 쓴 이는 양촌(陽村)이었던 것이다. 이제 설공이 이 다락을 중신하매 그 제도나 공정이 족히 두 김씨와 송씨에 추배(追配)할 수 있겠으나, 다만 그 가문을 짓게 된 자가 네 선생의 제자에도 나란히 할 수 없으니, 그 일을 어찌 하면 좋을까. 옛날 한퇴지가 등왕각(藤王閣)의 기문을 쓸 제, 그의 글이 세 왕씨(王氏)의 다음에 진열된 것을 영광으로 삼았더니, 내 이제 억지로 네 선생의 뒤에 있는 것은 반드시 세인의 웃음거리가 될지니, 장차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이거늘, 어찌 이른바 영광을 운위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설공의 부탁이 그만두지 않을 것이므로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그 경개를 서술하고는 또 뒤를 이어서 노래를 부르기를, “배와 수레가 모여듦이여, 네 거리의 용충이었다. 관개(冠蓋)가 바퀴를 잇달음이여, 이방 사람이 바람처럼 밀리누나. 이 다락이 없었다면 연호(宴犒)하고 의탁할 곳이 어디던고. 뉘라서 뜨거움을 잡고서 곧 물에 씻지 않으리요. 상산(商山)이 창창함이여, 낙수(落水)가 흐르누나. 앞의 일을 이음이여, 높은 집이 구름에 솟았구나. 청락(淸洛)이 얽히었고 상안(商顔)이 높았도다. 순창의 뒤를 이어서 유구토록 깎이지 않으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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