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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열전 01 (출생과 선계① : 1-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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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03 17:25 조회1,6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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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열전 01 (출생과 선계① : 1-15세)



2002년 1월 27일 모임을 대비해서 충렬공 휘방경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겠습니다.









▣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무릇 천하에서 존경을 받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一은 德이요 一은 壽요 一은 爵이니 군자가 처세함에 있어 그 하나 둘을 얻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그 셋을 다 얻을 수 있겠는가? 그 세가지를 결함이 없는 분은 오직 우리 상락공 뿐이다.



公의 성은 김이요 휘는 方慶이니 영가군 사람이다.

曾祖는 사호 벼슬을 지내신 義和요 贈검교 군기감이시고

祖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 敏成이시며 贈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이시고

考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孝印이시며 贈금자광록대부 중서령이시니

모두 公으로 인하여 추봉된 것이다.

비(어머니)는 원흥진부사 낭장 김해부 宋耆의 따님이시다









▣ 김방경 행장 (1350년, 안진 발)



김공方慶은 안동대도호부 사람으로서 병부상서 한림학사로 중서령에 추봉된 孝印의 아들이고 직사관 敏成의 손자요 신라 경순왕 김부의 9세손이다. (구보에 15세손이라 함은 오전이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께서 임신하실 때에 구름과 안개 잡수시는 꿈을 자주 꾸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입과 코에는 항상 雲氣가 남아 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 중에서 점지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公은 어릴 때 안동에 있는 조부의 집에서 자라는데 조금이라도 불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길거리에 나가 누워서 울어도 수레와 말들이 지나가지 못하니 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 고려사 김방경 열전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의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은 성품이 엄격하고 굳센 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를 잘 썼으며 과거에 합격하여 그 후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처음에 김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구름과 안개를 들여마시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그가 일찍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구름과 같은 기(氣)가 항상 내 입과 코에 서리어 있으니 이번 아이는 반드시 신선들 가운데서 내려와 잉태된 것이리라”고 하였었다.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敏成)의 집에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드러누워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 안동김씨 대동보



⊙ 6대조 叔承

--- 공부시랑 평장사

--- 공으로부터 비로소 안동에 봉해졌다.





⊙ 5대조 日兢

--- 금자광록대부 상서 우복야 삼한공신 태사대광

--- [조선씨족통보]에 안동김씨 시조는 일긍이다. 라고 한 것은 와전이다.





⊙ 고조 利請

--- 상락군 (안동태수)

--- 공은 고령 즉 안동에 거주하였다. [여지승람 본부 인물기]에 世載名德 受籍安東 自公始 라고 기록





⊙ 증조 義和

--- 위위부 주부 (예부시랑)에 추봉





⊙ 조 敏成

--- 문과

--- 한림직사관 겸 장치서령을 지내고, 상서 우복야에 추봉

--- 묘는 안동부 西一息 화림촌에 있다.





⊙ 백부 孝恭

--- 敞으로 개명, 고려 희종조 문과

---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 諡號 文簡

--- 공의 성품이 온화하고 남에게 오만하지 않았으며, 임종시 조카 方慶등에게 예장으로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하는 사실이 여사와 승람에 보인다.





⊙ 고 孝印

--- 고려희종 戊辰(무진) 문과

---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지제고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수문전 태학사 판이병부 어사대사 중서령에 추봉

--- 고종 癸丑(계축) 11월 15일 졸

--- 배는 금관국대부인 금녕송씨로 신호위 정용 낭장 宋耆의 따님이다.



公性嚴毅 善隸字 文章事業 傑出一世 事見勝覽 師事致仕英烈公琴儀 名冠士林 早年登第 世稱琴學士 玉筍門生 筆跡在 淸河內延寺 靈巖道甲寺 康津月南寺 遺基等地 而俱以君命書碑文



공은 성품이 엄숙하고 굳셌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傑出)하였으니, 그 일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보인다.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 둔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름이 사림에서 으뜸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니 세상에서 칭하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필적이 청하(淸河)의 내연사(內延寺), 영암(靈巖)의 도갑사(道甲寺), 강진(康津)의 월남사(月南寺) 등지에 있는데, 모두 임금의 명으로 비명(碑銘)을 쓴 것이다.



* 琴儀 : 1153~1230. 初名은 克儀, 字는 節之, 本官은 奉化, 諡號는 英烈.

* 琴學士玉筍門生 : 금학사의 옥순과 같이 뛰어난 문생들. 경기체가의 첫 장의 일부.





★ 경북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문을 보면 1224년에 이 비를 세울 당시

---"장사랑 대관서승 겸 보문각 교감"을 지내시고

★ 전남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前面 비문을 보면 1235 (또는 1238-1241년 사이) 년에 이 비문을 지을 당시

---"장사랑 중서사인 지제고 태자사의랑 사 자금어대"를 지내시고,

★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後面 비문을 보면 1250년에 이 비문을 세울 당시

---"비서감"을 지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숙부 효구 (孝 ?)

--- 동정을 지내고

--- 아들 유선 (惟善)은 검교감 군기감을 지냈다.





⊙ 숙부 효수 (孝 ?)

--- 상락백 밀직부사를 지내고

--- 아들 천석(天錫)이 있다.





⊙ 숙부 효조 (孝祖)

--- 좌정승, 상락후를 지내고

--- 아들 천필(天弼)이 있다.





⊙ 고모는

--- 宰臣 윤행에게 출가하였다.





⊙ 동생 之慶

--- 밀직부사, 동경유수

--- 아들 성은 한림학사 문하시랑을

--- 성의 아들 영유는 좌정승, 계림군을, 영수는 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 동생 玄慶

--- 좌정승, 시호 忠順

--- 아들 준은 첨의찬성사 (배는 찬성사 왕창의 따님)

--- 준의 아들 영성은 정당문학 합문지후를 지내고, 영성의 아들 격은 공조전서를 지내고 (배는 야은 길재의 따님)

--- 준의 아들 영규는 문과급제, 전서 수성백을 지내고 시호 文惠. 역성최씨하여 수성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 준의 아들 영기는 대인 도의사를 지내고, 영기의 아들 약은 사정을, 약의 아들 士文은 평의시중랑을 지냈다.





⊙ 매부 (매서)

--- 강분은 박주수령을 지내고, 권천은 연주수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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