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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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08 22:55 조회1,592회 댓글0건본문
내일모레 대구 답사를 앞두고
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 관련 자료를
연보식으로 모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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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략정보
1457(세조 3)∼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미수(眉 ), 호는 만보당(晩保堂). 첨지중추부사 적( )의 아들이다. 좌의정 질( )의 조카이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좌정승 사형(士衡)의 현손이다.
2. 과거급제
일곱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재주를 기특하게 여겼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주서·홍문관정자·의정부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 조선문과방목
김수동(金壽童) More Info.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18(丙科18)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57년, 정축 자(字) 미수(眉?)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경,정국공신/영가부원군(文敬,靖國功臣/永嘉府院君)
>>> 가족사항
부(父) 김적(金?)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종숙(金宗淑) 증조부(曾祖父) 김승(金陞)
외조부(外祖父) 안질(安質) 처부(妻父) 이계희(李季禧)
숙(叔) 김질(金?)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74(갑오)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효력부위(效力副尉) 품계(品階)
관직(官職) 영의정%(領議政%), 한림&(翰林&)
<신도비명>
기해(1479)년에 승정원 주서가 되어 만기를 채우고 군기시 주부를 제수하였고 사헌부 감찰과 예조와 호조의 좌랑과 세자 시강원 사서를 역임하고 ---
***예조좌랑시 윤여림지선 묘비를 서하였다.
공은 일찍 급제하여 주서(注書)가 되어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채수(蔡壽)가 당시 승지로 있으면서 공의 단정하고 진중함을 아꼈는데, 자신의 아들 채소권(蔡紹權 판서)의 아명(兒名)을 ‘수동(壽童)’이라 하였다. 《해동악부(海東樂府)》
◇ 채소권(蔡紹權)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초명은 김수동(金壽童)의 이름을 딴 수동(壽童)이다.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옹(拙翁). 정국공신(靖國功臣) 지중추부사 수(壽)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가 되고, 1506년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김안로(金安老)의 처남이나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김안로가 정유삼흉(丁酉三兇)으로 몰렸을 때 홀로 큰 화를 입지 않았다.
◇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사편 1 - 인사류 2 시호 諡號
시법(諡法)의 시말(始末)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55)
---성종(成宗) 15년(1484)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이계손(李繼孫)의 시호에 대해 장경(長敬)ㆍ정헌(玎憲) 두 가지로 의진(擬進)하였는데, 시호법에 "그 의의(意義)를 진술하지 못하는 것을 정(玎)이라 한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경헌(敬憲)으로 결정하였다. ★김수동(金壽童)이 말하기를,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는 편정공(?玎公), 여산군(礪山君) 송익손(宋益孫)은 양묵공(襄墨公), 고려 때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황무공(荒繆公)이다."
하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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