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 05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10-08 23:01 조회1,515회 댓글0건본문
10. 성 품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온화하고 고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영의정 김수동은 단정하고 무게가 있으며 지혜가 많았다. 유생(儒生) 때부터 정승이 되기까지 사람들이 그를 시비하지 못하였다. 연산(燕山)이 흉악 잔인한 짓을 하던 때에도 때를 따라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하여 임금에 대해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살렸으므로 많이 그에게 힘입어 사대부들이 보전하였다. 《음애잡기(陰崖雜記)》
공은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았다. 서생 때부터 수상이 되기까지 사람들이 그를 시비하지 못했다. 흉악하고 잔인한 연산주 때에 총애를 받아 정승으로 들어갔으나, 때에 따라 신축성 있게 처신하여 위로는 임금에게 죄를 입지 않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으니, 공의 힘으로 목숨을 보전한 이가 많았다. 그때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집을 사치하게 꾸미고 대문 밖에는 뇌물짐이 저자를 이루었으나, 공은 홀로 그렇지 않았다. 반정하는 날에 성희안(成希顔)이 가서 말하니 함부로 굽혀 따르지도 않고 조급히 굴지도 아니하고 조용히 헤아린 뒤에 행동하여 사림들이 공의 도량에 탄복했다고 한다. 《음애잡기》
중종조(中宗朝)에 사직하고 집에 나와 있다가 죽었다. 무오ㆍ갑자사화에 선비들이 많이 죽었는데, 현명한 공이 그때에 은퇴하지 못하고 또 반정한 뒤에야 은퇴하였다. 군자가 그에게 모든 것을 잘하기를 요구하노니 어찌 그를 위해 세 번 탄식하지 않겠는가. 《해동악부》
◇ 연려실기술 별집 제10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시호(諡號)의 의정(議定)
우리 나라 법에 봉상시에서 시호의 의정을 주장하게 되어 있는데, 중종이 중흥한 이래로 시호의 의정이 부정하므로, 홍문관의 응교 이상이 가서 참석하여 논박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때에 ★김수동(金壽童)의 시호를 경순공(頃順公)이라 하고, 유순정(柳順汀)의 시호를 무안공(武安公)이라 하였는데, --- 《음애일기(陰崖日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