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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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08 23:00 조회1,580회 댓글0건본문
9. 영의정, 왜변진압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 암행어사(暗行御史)
왕의 특명으로 지방군현에 밀견(密遣)되어 변복으로 암행하면서 수령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를 탐문하여 사실대로 복명하는 것을 직무로 하는 임시적 사신. 수의(繡衣) 또는 직지(直指)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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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라는 성어(成語)가 실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중종 4년(1509) 11월 정묘조에 부원군(府院君) 김수동(金壽童)이 “근일 암행어사를 분견하여 수령의 범죄를 적발하는 것은 편치 못한 일이오.”라고 한 발언 속에 나타나는데, 이 말은 중종이 근자에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많이 파견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 공신 김수동이 벼슬을 사양한 사실을 노래한 〈상공래 相公來〉
악부(樂府)
과거의 우리나라 역사 또는 풍속을 묘사한 시와 민요풍의 노래, 시조 · 민요의 한역가(漢譯歌)인 소악부, 지방의 풍물 · 민속을 기사한 죽지사(竹枝詞), 의고악부(擬古樂府) 등의 총칭. 악부는 학자에 따라 근체시, 고시(古詩)와 같은 갈래 개념으로 파악되거나, 또는 한국 한시상의 한 시체(詩體)를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 악부의 전성기는 조선조 후기로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풍속에 근거한 ‘조선악부’가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17세기 초 심광세(沈光世)가 〈해동악부 海東樂府〉(1617)라는 제명하에 44편의 시를 지었고,
--- 악부문학의 전환을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 심광세는, 김종직이 〈동도악부〉에서 민간설화의 문학화를 시도한 데 비해서 악부를 영사시의 형태로 체계를 세운 것이 특징이다. 그의 〈해동악부〉에는 기자조선이 위만에게, 마한왕이 백제왕에게 땅을 빌려 주었다가 오히려 망한 사실을 쓴 〈차지한 借地恨〉부터 중종반정의 공신 김수동이 벼슬을 사양한 사실을 노래한 〈상공래 相公來〉까지 실려 있는 바, 특히 이성계의 역성혁명, 세조 찬위시 선비들의 지절문제가 많이 다루어졌다.
◇ 만보당 관련 전설 <보도백각불>
홍제2동과 홍은2동의 경계를 이루는 홍제천이 홍지문 옆의 오간수대문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서쪽으로 휘돌아가는 홍은동 8번지 지점에 이르면 1973년 6월 7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고종 5년(1868)에 정관대사(淨觀大師)가 중창한 옥천암(玉泉庵)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옥천암은 신라시대 장의사(藏義寺) 터로 알려져 있다. 이 장의사는 조선 초까지 만해도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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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도 이 석불에 기원을 했고, 임진왜란 때는 도원수 권율(權慄)이 소수의 병력으로 이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백불을 보고 많은 사람이 매복해 있다고 착각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참패를 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종의 어머니도 여기에서 아들의 복을 빌었다고 하며, 이 백불과 관련된 여인의 전설도 있다.
즉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동(金壽童)이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그의 부인이 너무나 박색(薄色)이라 시어머니가 이들을 쫓아냈다. 이들 모자는 결국 산 속의 동굴에서 굶어 죽었고, 죽기 직전에 남편에게 남겨 놓은 글에서 자기를 개울가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차마 개울가에 묻어줄 수 없었던 김수동은 시신을 양지 바른 언덕에 묻었다. 그 이후 밤마다 그녀의 혼이 나타나 소원대로 묻어줄 것을 간청하여 김수동이 왕의 허락을 받아 이곳으로 이장해서 묻고 바위에 아내의 상을 새기는 한편 바위 위에는 작은 절을 지었다 한다. 세월이 흘러 이 여인의 묘소는 성역화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한다. 이후 김수동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잊혀지고 승려들이 바위에 새겨진 상을 부처님이라고 주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이 백불을 관리하고 있는 옥천암에 관하여는 『한경지략』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창의문 밖 북문 옆에 옥천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샘물이 언덕 위 바위 사이에서 흘러 내려 풍증이나 체증이 있는 사람이 마시면 신통하게 낫고, 눈병도 이 물에 씻으면 낫는다고 하였다. 이 약수를 마시러 옥천암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물을 많이 마시기 위하여 먼저 짠 것을 많이 먹은 뒤에 물을 종일토록 마셔 배가 불러야만 그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라고 소개하고 있어 옥천암의 옥천라는 이름이 이곳에서 나는 샘물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현재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로 비구니 사찰이다.
《출전 : 서울500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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