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 11 ---이의무(1449-1507) 연헌잡고(蓮軒雜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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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09 12:35 조회1,743회 댓글0건본문
蓮軒雜稿卷之二
雜詩類
●金眉叟學射於西所。戲寄。 壽童 015_312b
黽勉誰勤一藝名。長年執射謾勞形。不知才拙由天賦。更向傍人苦乞靈。
이의무(李宜茂) More Info.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19(丙科19)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49년, 기사
자(字) 형지(馨之)
호(號) 연헌(蓮軒)
본관(本貫) 덕수(德水)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이추(李抽)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명신(李明晨)
증조부(曾祖父) 이양(李揚)
외조부(外祖父) 윤회(尹淮)
처부(妻父) 성희(成熺)
자(子) 이사행(李??荇)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68(무자) 생원시/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사간&(司諫&), 호당&(湖堂&)
이의무(李宜茂)
1449(세종 31)∼1507(중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형지(馨之), 호는 연헌(蓮軒). 아버지는 온양군사 추(抽)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윤회(尹淮)의 딸이다.
1467년(세조 13) 사마시를 거쳐 1477년(성종 8)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박사·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을 역임하고, 1487년 성균관전적으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여 녹피(鹿皮)를 하사받았다.
이해 홍문관교리로 밀양에 파견되어 흥학(興學)에 관한 일을 조사, 보고하고, 이듬해 사헌부지평, 1492년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493년 홍문관응교로서 형벌을 남용하여 임실현감 노처리(盧處利)를 치사(致死)하게 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사간원사간, 이듬해 사헌부집의·상의원정을 역임하고,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어천역(魚川驛)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502년 성균관사성·군기시정에 보직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외직을 청하여 홍주목사로 나갔다가 기한내에 조세를 수납(輸納)하지 않아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1507년(중종 2) 선정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기도(氣度)가 활달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등조(登朝)한 지 30여년에 조금의 저축도 없어 가세가 늘 청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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