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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85 ---이시발(1569~1626) 벽오유고(碧梧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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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17 15:38 조회2,0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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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유고(碧梧遺稿)

서지사항 :
이시발(李時發) 저 원집7권·부록1권 합4책(308판) 사본(寫本) 【장】이춘희(李春熙). 한국문집총간 74집.

저자소개 :
이시발(1569~1626)의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충익(忠翼). 이덕윤(李德胤)의 문인.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활약함. 이몽학의 난을 토벌함. 형조 판서, 삼남도검찰사(三南都檢察使)에 이름.

문집구성 :
저본은 편집 및 서사(書寫) 경위가 불분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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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국문집총간 碧梧遺稿 高麗宣忠協謀靖難定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이시발 ? - - - -


碧梧先生遺稿卷之五

墓誌
高麗宣忠協謀靖難定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074_470a

安東之金。系出新羅敬順王。公爲十五世孫。生麗代。仕高元忠烈朝。勳業茂著。轟?古今。載在國史及行狀。斑斑可攷。姑撮其表表者言之。則忠直信厚。得於
▶ 074_470b
天性。制行也勤儉寡默。立朝也竭忠奉國。至於行師有律。戰克攻取。珍島之役。日本之征。此其大較也。厥後內外苗裔趾美?赫。三百年于?。豈非所謂德厚者流光歟。墓在禮安縣治西陵洞。神道有麗王命立碑。世久無徵。姓孫禮生曾監此縣。?碣爲標。今幷與此碣而破折。嗚呼。後之人何以知爲公之墓乎。參奉金坼,生員金坪。以外裔居墓下。與姓孫參奉慶建?在近諸孫。謀易他石以新之。且加封植。來語余。余於公。爲母姓十三代孫。嘗拜公之墓。爲之助其資。仍識其梗?云。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
▶ 074_470c
度使。大丘莩護府使。巡察使李某。志。


■ 충렬공묘지문(이시발 지음)번역
---유림학당 국회씨의 번역

高麗 宣忠協謀 靖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上洛 忠烈公 金方慶 墓誌
(고려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 충렬공 김방경 묘지)

安東之金, 系出新羅敬順王.
안동 김씨는, 가계가 신라 경순왕에게서 나왔다.

公爲十五世孫. 生麗代. 仕高元忠烈朝. 勳業茂著. 轟갈(1)古今. 載在國史及行狀. 斑斑可攷. *(1=車+葛)
공(충렬공 김방경)은 15세손이 되는데, 고려시대에 나서, 고려 충렬왕대에 벼슬하여, 공업이
무성하게 드러나 고금에 크게 떨쳤으니, 행적이 국사(고려사)와 행장에 있어, 또렷하게 살필 수 있다.

姑撮其表表者言之 則忠直信厚. 得於天性. 制行也勤儉寡默. 立朝也竭忠奉國. 至於行師有律. 戰克攻取. 珍島之役. 日本之征. 此其大較也.
잠시 그 뚜렷한 것만을 모아 말한다면, 곧 충직하고 신후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니, 행동을 절제함에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묵하였으며, 조정에서 복무할 때에는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었고, 군사일에 나아감에 이르러서는 법도가 있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얻었으니, 진도의 싸움과 일본의 정벌 등 이것이 그 대략이다.

厥後內外苗裔趾美석(2)赫. 三百年于玆. 豈非所謂德厚者流光歟. 墓在禮安縣治西陵洞. 神道有麗王命立碑. (*2=潟-삼수변=신 석, 까치작, )
그 뒤로 안팎으로 후손들이 종적이 아름답고 크게 빛나기를 지금까지 300년이니, 어찌 이른 바 덕이 깊은 사람이 끼친 후광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현 관내 서릉동에 있고, 신도는 고려 왕명으로 비를 세움이 있었다(고 하나)

世久無徵. 姓孫禮生曾監此縣. 竪碣爲標. 今幷與此碣而破折. 嗚呼. 後之人何以知公之墓乎.
세대가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 후손인 ★예생(禮生)이 일찍이 이 현(예안현)을 살펴보고, 비석을 세우고 표식을 하였는데, 이제는 이 비석과 더불어 깨져 버렸다. 아! 뒷사람이 어떻게 (충렬)공의 묘임을 알 수 있겠는가?

參奉金坼生員金坪. 以外裔居墓下. 與姓孫參奉慶達  在近諸孫. 謀易他石以新之. 且加封植. 來語余. 余於公. 爲母姓十三代孫. 嘗拜公之墓. 爲之助其資. 仍識其梗槪云.
참봉 ★김탁과 생원 ★김평등 여러 후예가 묘 아래에서 거쳐하였는데, 후손 참봉 ★경달(慶達)과 가까이 사는 여러 후손들과 함께 다른 돌로 바꿔서 새롭게 하기를 꾀하고, 장차 이를 북돋아 세우고자 하여, 찾아와 내게 말하였다. 나는 (충렬)공에 대하여, 어머니의 성(외가)으로 13대 후손이 되니, 일찍이 공의 묘소에 참배하였고, 비석을 세우는 데 재물을 도왔으니, 이 때문에 그 대강을 알게 되었다.

嘉善大夫 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大丘府 都護府使 巡察使 李某志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부 도호부사 순찰사 ★이모(李時發)가 기록한다.

풀어쓴이;김국회(익원공파, 유림학당)
옮긴이:김영환(문온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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