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方慶 열전 06 (개경환도와 몽고강화① : 49-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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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09 15:51 조회1,671회 댓글0건본문
2002년 1월 27일 모임을 대비해서 충렬공 휘방경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 열전 06 (개경환도와 몽고강화① : 49-57세)
1260년 (원종1, 49세) 大將軍, 개경환도를 위해 太孫(뒤의 충렬왕)이 출배별감 삼음
1263년 (원종4, 52세) 御使中丞, 知御史臺事 겸 선군별감사
1265년 (원종6, 54세) 大將軍, 元에 進奉使 (1차 入元) 上將軍
1268년 (원종9, 57세) 전분의 무고로 (첫번째 무고) 남경으로 좌천, 3일만에 복직,
판례빈성사, 북계兵馬使, 서북면兵馬使, 형부尙書, 추밀원副使
▣ 김방경 묘지명 (1300, 이진 撰)
--- 관련내용 없음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大將軍을 또 배명하고 지합문형부사와 知御史臺事로 제수되고 선군별감사를 겸하게 되니 매일 첫 닭이 울면 선군청에 앉아서 訟事를 판결하고 날이 밝으면 御史臺에 들어가서 모든 기강을 더욱 준엄하게 하였다.
그때에 좌승선 유천우가 오래동안 집권하고 있어 여러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 위풍을 추증해서 아첨을 하는 터인데, 公이 등청길에 도중에서 홀연히 그를 만나자 말을 탄 그대로 읍만 하고 지나가려고 하니 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조삼으로 왕명을 봉행하는데 3품이하는 피하지 않는 자가 없거늘 그대는 유독 어찌하여 이와같이 대하는가?" 고 하니
公이 말하기를 "그대도 3품이요 나도 또한 3품이며 그대도 조삼으로 봉명하고 나도 또한 조삼으로 봉명하는 터이니 나는 예만 행할 따름이다" 고 하여 서로가 한참동안 다투다가, 公은 "오늘은 시간이 늦었다" 하고 곧 가버리니
천우가 깊이 혐의를 품고 무릇 公의 친족 중에서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있어도 번번히 억제하고 등용하지 않았으나 公은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이내 상국(원나라)의 進奉使가 되어서 갈 때 나라의 노자돈(출장비)인 금, 은 등의 물품을 혹시 궐원이 있어 받을 사람이 없을 때는 행인(출장갔던 사람)들이 오직 써버린 바 있으나 公은 다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서 국고에 반납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국가가 바야흐로 서북지방이 크게 위태하여 걱정되므로 북방을 진무하자면 반드시 덕망이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만 되기 때문에 公으로써 이에 당하게 하니 여러 성의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마침 모상을 당하여 고향에 가셨다가 돌아와서
얼마 안 돼서 上將軍이 되어서 법으로써 重房(당시에 행정전반을 감독하던 기관을 都房이라 하고, 군부를 감독하던 기관을 重房이라 하였음)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조문도교위 응양상장군 전분 (원나라 장군)이 公의 좌하에 있음을 질투하여 감히 항거하고 권신에게 무고하여 公이 남경으로 좌천되었으니 이 때가 바로 지원5년 (1268) 戊辰 2월이었다.
그때에 우승선 朴琪가 대조(원나라 조정)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북방 40여성을 두루 거쳐 왔는데 그곳 백성들의 연명장에 의하면 "만약에 다시 公을 얻게 된다면 우리들은 안거낙업을 하여 전심으로 나라를 도울 것이다." 고 진정하였다.
이래서 公은 남경(지금의 서울)에서 사흘을 지난 후에 판례빈성사로 승진되고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형부상서 추밀원부사로 들어갔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원종 4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되었다.
이 시기에 좌승선(左承宣)으로 있던 유천우(兪千遇)는 오랫동안 정권(관리 임명권)을 잡고 있었다. 양반 관료들이 모두 그에게 아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번은 김방경이 길 가는 도중에서 유천우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례(揖禮-두 손을 약간 올리고 고개를 숙이는 인사)를 하였더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 봉명이므로 3품 이하의 인원들은 모두 피마(避馬-말을 딴 방향으로 돌리어 경의를 표시하는 예식)를 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런가?”라고 따지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또 조삼 봉명이므로 나는 예식대로 인사하려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한참이나 따지고 책망하던 중에 김방경은 “시간이 많이 갔구만!”하고 드디어 결판도 내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유천우는 마음속으로 이 일을 아주 언짢게 생각하고 무릇 김방경의 일가 친척으로서 벼슬살이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구실을 붙여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김방경은 그런 것쯤은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그 후에 진도(珍島)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김방경은 전라도에서 군대를 초모하게 되었는데 유천우의 전장(田莊-농장, 소유지)이 장서현(長沙縣-모장(茂長)에 있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그에게 피해되지 않도록 하라고 훈계하였다.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자 어떤 일이 있어서 중방(重房)의 장교 한 명을 곤장으로 치게 하였더니 이때에 반주(班主)로 있었던 전분이 김방경의 처사를 미워하여 권신에게 고소하여 김방경을 강직시켜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게 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서북면(西北面) 병마사로 있었을 때 그 지방 사람들에게 좋은 정치를 하여 인심을 얻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북면의 여러 고을들에서 왕에게 글을 올려 김방경으로 하여금 다시 와서 진무(鎭撫)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방경이 남경으로 부임한 지 겨우 사흘만에 왕은 그에게 다시 서북면을 진무하는 일을 맡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후 중앙 정부에 들어와서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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