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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의사 의거70주년 (1.8, 효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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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09 22:50 조회1,6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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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월 8일 효창원에서는 이봉창의사 의거 70주년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조선일보에 이에 관련된 기사가 있어 그대로 퍼서 올립니다.











[만물상] 이봉창 의사 (2002.01.07)





1931년 늦가을 어느날 김구가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 있는데 부엌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한 청년이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하고 목청을 높였다. 누군가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하자 그 청년은 분개해 소리쳤다. 『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陵行)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나는 그때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었으면 천황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소.』 청년의 이름은 이봉창(李奉昌)이었다.



어려서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 철공소 공원 등을 전전하며 19세 때 3·1 만세운동을 겪은 이봉창은 일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었다. 그날 밤 민단 옆 여관방에서 이봉창은 김구에게 말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치겠습니다.』



1931년 12월 이봉창은 무장항일단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김구로부터 히로히토(裕仁) 일왕 폭살임무를 받았다. 그는『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한 뒤 폭탄(수류탄)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회연(懷然)한 표정의 김구에게 이봉창은 오히려 『나는 영원한 쾌락을 향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양인이 희열한 안색을 띠고 사진을 찍읍시다』고 권하며 미소를 지었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는 꼭두각시 만주국 황제 푸이(傅儀)를 데려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했다. 경시청 앞에서 관중 속에 섞여있던 이봉창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음과 함께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다. 그러나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봉창은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봉창은 그해 10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봉창 의사 기념사업회는 오늘 오전 11시 서울 효창원에서 의거 7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이 의사의 거사는 분열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국내외 독립운동의 열기와 역량을 재결집하는 계기가 된 쾌거였음에도 그의 유지(遺志)는 변변한 기념관 하나도 없이 퇴색하고 있다. 폭살의 대상이 일왕이어서 그런가. 교과서 파동, 야스쿠니 신사 참배, 종군위안부, 어업협정 문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후손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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