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지 제출자료 04---김공량(金公亮, 1472∼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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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28 08:54 조회1,536회 댓글3건본문
김공량(金公亮, 1472∼1544)
김성(金城, 1451~1487)의 세 아들 공량(公亮), 공석(公奭), 공망(公望)중 첫째 아들이다. 자는 필지(弼之), 호는 양곡(楊谷). 태어난 지 열흘도 못 되어 모친(허손許蓀의 딸)이 돌아가심으로 증조모(金丸의 배위로 이백연李伯衍의 딸) 밑에서 자랐는데, 자랄수록 말수가 적고 장난과 희롱을 않고 스스로 글 읽기를 좋아하여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 1454∼1504)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동생 공망(公望, 1482~1528)도 주계군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연산군때 과거에 합격하여 장차 큰일을 하리라 기대되었으나, 연산군 시절의 정치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주계군이 화를 만나자,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끊고 전시(殿試)를 보지 않았다. 동생 공망(公望)은 150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내구(內舅)인 허종(許琮)이 벼슬에 나가도록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등이 권력을 휘둘러 여러 현인들을 무고하여 죽였다. 매서(妹壻)인 박세희(朴世熹, 1491∼?)도 역시 화를 입었다. 이에 마침내 세상사에 대한 뜻을 끊어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궤안(机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두지를 않았다. 사적(事蹟)은 박세채(朴世채)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자세하다.
묘는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白壤洞)에 있는데, 묘갈(墓碣)은 사후 2년 지난 1546년에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판서가 명을 짓고 동고(東皐) 김로(金魯) 교리가 글씨를 써서 세운 것이다.
1590년(선조23) 셋째아들 김주(金澍, 1512~1563)가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 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에 사후 책봉되었을 때, 그에게 순충적덕 보조공신(純忠積德 補祚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경연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홍문관대제학 지춘추성균관사(兼知經筵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弘文館大提學 知春秋成均館事) 안원군(安原君)을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이암집>(송인), <호음집>(정사룡), <우암집>(김주), <동유사우록>(박세채)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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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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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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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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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체가 달라졌습니다. 게시판 기능을 활용하시기 시작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용주종친님, 여주 묘역의 각 선조님 묘소 사진은 준비되어 있나요?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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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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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