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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 제출자료 05---김공석(金公奭, 1477∼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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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29 08:50 조회1,649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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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석(金公奭, 1477∼1553)

     김성(金城, 1451~1487)의 세 아들 공량(公亮), 공석(公奭), 공망(公望)중 둘째 아들이다. 자는 주경(周卿).

     1507년(중종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금위(內禁衛)에 배속되면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1510년(중종5) 조라포 만호(助羅浦萬戶), 이어서 선전관(宣傳官),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종성부 판관(鍾城府判官)에 조발(調發)되고, 의영고 령(義盈庫令)으로 전임되었다.

     얼마 있다가 보성군(寶城郡) 수령으로 나갔는데, 요역을 경감하고 부세(賦稅)를 낮추며 해묵은 폐단을 없애려고 힘쓰기를 삼년 동안 하였다. 1521년 모친이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렀다. 그 뒤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을 제수받고,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로 전직하였다. 얼마 있다가 경원 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로 개수되었고, 비의(緋依)를 하사받고 당상관에 올랐다.

     1528년(중종23)에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를 제수받고, 신묘에 함경북도 우후(咸鏡北道虞侯)로 이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진급되고, 체직되어 돌아와 호조, 형조의 참의, 1534년(중종29) 공조의 참의를 지냈다.

     1535년(중종30) 특진관 최세절(崔世節)이 김공석(金公奭), 원팽조(元彭祖) 등과 함께 왜선의 출몰이 심하던 다대포와 부산포 등처를 가서 살펴 보고, 몰운도(沒雲島)는 곧 왜선(倭船)의 후망처(候望處)이니, 이곳에 봉수를 설치하기를 아뢰었다. 호남의 조운(漕運)은 바닷길이 험악해서 계속 썩은 것이 실려 오므로, 대신이 의론하여 김공석을 찰리사(察里使)로 천거해서 의항(蟻項)을 파서 그 길을 통하게 하였다. 특별히 명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려지고 의주(義州)의 목사가 되었다. 

     1540년(중종35)에 전라 우수사, 강릉부사(江陵府使), 이어서 북새(北塞)의 총병(摠兵)이 되었으며, 1542년(중종37) 함경도 관찰사 김섬이 북도 병사(北道兵使) 김공석(金公奭)과 함께 육진(六鎭)을 순행하며 형편을 살피고,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시켜야 한다고 아뢰었다.

     1543년(중종38) 병조 판서 임권(任權), 형조 판서 신광한(申光漢), 포도 대장 김공석(金公奭) 등이 함께 의논하여 포도 절목(捕盜節目)을 마련한 단자(單子)에, 도적의 발생 원인과 야간 순시를 아뢰었다.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544년(중종39)에 다시 호남 도총병마사가 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45년(명종즉위년) 전라 병사 김공석(金公奭)의 서장을 정원에 내리면서, 중국에서 전수한 총통에 대해 세밀하게 전습할 것을 명했다. 1547년(명종2)에 청홍도 병마사로 옮겼다가 다시 중추부(中樞府)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훈련원 도정으로 옮겼다.


     공은 천성이 인자하고 자상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온 힘을 다하여 나라를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어서, 조치할 바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여러 날을 계속하였다. 고을 수령의 부절(符節)을 찼을 때는 백성들 사이에 사랑을 끼쳤다. 병마를 통솔할 때는 사람들이 즐겨 공을 위해 일하려고 하였다. 몸가짐을 맑고 근실히 하며, 마음을 보존해서 우아하고 고요하였으며, 산업을 도모하지 않고 화려하고 분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직위가 2품에 이르렀어도 쌀을 담는 항아리가 자주 비었다. 비록 궁검(弓劒)으로 발신하였지만 담박하기가 유학자 같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의 병을 간호하여 약을 달여 올릴 때는 옷에서 띠를 풀지 않았다. 제사는 지극히 정성되이 하여, 제수로 올리는 물건을 몸소 점검하고 진설하였다. 형제를 대할 때는 경건하면서도 화평하였고, 노복을 다스릴 때는 관대하면서도 장엄하였다. 친족과 친구들 가운데 궁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인정을 다하여 물품을 조달해서 구하였다.


     1552년(명종7) 다시 청홍도 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가 되었으나, 불과 1년이 안되어서 계축년 가을에 조카 김주가 왕명을 받아 연경으로 갈 때 청홍도(淸洪道)의 수영(水營)에서 질병으로 생을 마치시니 향년 77세였다. 다음 해 2월 25일에 터를 가려 여주(驪州) 사동(蛇洞)의 선영 곁에 장례 지내졌다.

     1555년(명종10) 조카 김주(金澍)가 숙부 병사공(兵使公) 김공석(金公奭)의 신도비문을 지었고, 당대의 명필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박영(朴泳)이 전(篆)을 써서 신도비를 세웠다. 묘와 신도비는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우암집>(김주)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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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고생 하십니다
대부 감사 함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정중
작성일

  덕분에 공부 잘 하고 있습니다 땡큐~~!!!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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